이달의 표지 작가허우중
1 <그늘 쌓기> 캔버스에 유화 | 194×97cm | 20200
2 <무게 조각> 캔버스에 유화 | 73×73cm | 2020
3 <여백의 지층 No.4> 캔버스에 유화 | 112×112cm | 2020
하얀 도형들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제각기 다른 빛을 띤다.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림자는 마주한 공백보다도 말이 없다. 그저 여러 갈래로 뻗은 선들을 균일한 표면에 숨겨줄 뿐이다. 여백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곡선이 도형의 일부를 지칭하고 그에 상응하는 색면은 나머지 윤곽을 암시한다. 이렇게 취합한 정보로 부분적이나마 육면체·삼각뿔·원과 같은 도형임을 유추할 수 있으나 여러 겹으로 포개진 도형들이 서로가 서로를 가리며 전체 모습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봉인된다. 색면과 색면 위에 다시 칠해진 여백은 주체와 객체의 역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며 대치한다. 베일에 가려진 대상은 규정할 수 없고,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은 유보된다. 이면을 볼 수 없는 한계성은 역으로 형태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불규칙적으로 배치된 도상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질서와 체계를 갖춘 듯 보인다. 특정한 구심점 없이 나열된 방식은 되풀이되는 측면에서 패턴과 유사하다. 선과 면으로 구성된 일련의 형상에서 찾을 수 있는 규칙성은 패턴의 무한성을 지향한다. 반복을 거듭하는 패턴은 특별한 경계나 제약 없이 계속해서 확장한다. 개별 작품은 어느 한 패턴으로부터 오려두기를 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며 그 반대로 붙여 넣기를 한 결과라 봐도 역시 무관하다. 처음과 끝을 상정할 수 없는 패턴 특성은 <여백의 지층>(2020) 연작에서 동일한 하나의 도안을 프레임의 배율을 다르게 해서 보여주는 방법으로 드러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백은 실상 채워져 있듯이 선과 면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 또한 모호하다. 독립성과 상호 의존성이 공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체와 전체 사이의 관계는 언제든 역전될 수 있으며 그것은 관점에 따라 결정된다. 제한된 관념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단편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한계를 갖지만, 그 한계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