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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202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수상 기념 연설문에는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 페이지에 적은 문장들이 언급됐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시간이 흘러, <소년이 온다>를 쓰는 한강 작가가 1980년 5월 당시 살해된 박용준의 일기에 적힌 문장(“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을 만나면서 거꾸로 뒤집힌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는 지나간 것, 잊힌 것,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일까? 과거야말로 현재를 도울 힘이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생의 언어 아닐까.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팀 밀란츠Tim Mielants 감독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을 보며 <소년이 온다>를 쓰던 한강이 계시처럼 얻은 그 ‘거꾸로 된’ 질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레어 키건은 2009년 <맡겨진 소녀>를 쓰고 11년이 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0을 발표했다. 단행본 분량은 114쪽.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작가 은유는 “핀셋으로 뽑아낸 듯 정교한 문장들은 서로 협력하고 조응하다 한 방에 시적인 순간을 탄생시킨다. 그것은 ‘뒤돌아보는 인간’의 탄생이다. ‘가족 인간’이기를 멈추는 선택이다.”라고 적었다. 여기까지만 적어도 한강의 연설문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나, 영화가 ‘시적인 순간’을 어떻게 영상으로 쌓아 완성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영화 읽기의 경험을 제공하리라 생각한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소도시에 살아가는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석탄 가게를 한다. 그는 직접 석탄을 배달하고, 밤이 되면 아내와 딸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온통 석탄재가 묻은 손을 구석구석 씻는다. 성실한 가장인 그는 독실한 가톨릭 공동체의 신뢰받는 일원이기도 하다. 예민해 보이는 그는 자주 침묵에 잠기는데, 그의 예민함도 침묵도 그의 일상을 돌아봐서는 그 이유를 헤아리기 어렵다. 무엇이 그를 자꾸 멈춰 세우는가? 그의 과거가 조금씩 단서를 드러내기 시작하기 전까지 관객은 그저 짐작할 뿐이다. 초조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그의 아내처럼. 아일랜드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는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이자 입양기관으로 기능했으나 실제로는 종교단체와 국가의 협력 아래 “타락한 여성”을 감금하고 노역에 이용했으며, 아이들을 강제로 입양 보내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그런 정보 없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빌 펄롱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빌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저항하는데도 불구하고 수녀원으로 끌려들어 가는 젊은 여자를 보게 된다. 추측하자면 가족들이 그녀를 데리고 온 듯 보인다. 아마도 그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을 한 듯하다. 그 수녀원은 그런 “타락한 여성”들을 보호하는 곳으로 알려졌으니까. 보호한다고? 실제로 그 안에서 여자들은 감금 상태에서 노역에 시달렸고 학대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수녀원의 더러운 비밀을 알고 있다. 하지만 수녀들이 마을의 실세이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고 있다. 나아가 수녀원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가는 적극적 보이콧을 당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석탄을 파는 빌에게 이 모든 것은 신경 써야 할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빌은 수녀원의 석탄 창고에 갇힌 미혼모(자라 데블린)를 발견한다. 그녀를 돕기 위해 수녀원으로 데리고 들어간 그는 안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젊은 여자들을 발견한다. 빌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수녀원장 메리(에밀리 왓슨)의 압박을 느끼지만, 아니,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처럼은 살 수 없게 된다. 불면은 심해진다. 침묵은 깊어진다. 영화는 사이사이 삽입한 과거 회상 신을 통해 빌이 일찍이 고아가 되었으나 어느 친절한 어른의 후원 아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지금의 그가 될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사생아인 빌을 낳은 어머니가 만일 좋은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막달레나 세탁소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면, 지금의 그는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다. 영화는 적막한 새벽,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빌의 모습을 보여준다. 닫힌 수녀원의 문을 응시하며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빌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지켜내야 할 아내와 다섯 딸이 있는 안락한 가정의 모습 또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거에 다시금 사로잡히는 모습을 화면에 담아낸다. 그의 어머니는 지금 그가 석탄 창고에서 발견한 학대 당하는 소녀다. 그의 갈등을 눈치챈 사람들은 그에게 경고한다. 수녀들에 대적하지 마. 하지만 석탄 창고에 갇힌 소녀를 두 번째로 발견한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어진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빌 펄롱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제목처럼 “이처럼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웃의 충고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운 좋게 얻은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행동하기를 택한다. 그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의 심경을 읽을 기회는 영화에서 오로지 행동으로 보여진다. 그의 망설임을 지켜보는 내내 생각하게 된다. 내가 행동할 수 있었던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일들에 대하여.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를 알면서 이 모든 일에 눈감을 수 있는가. 답을 구하는 질문은 기도처럼 절박해진다. 생활에 낡고 지친 소시민이 크리스마스 즈음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기적 혹은 축복은 이웃을, 동시에 그 자신을 구하는 것이었다.

글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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