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끌어올린 ‘근원적 비극’
‘우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우리보다는 어딘가 뛰어나다고 할 법한 인물의 운명이 어떤 과오나 결함으로 인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게 되는 일.’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비극tragedy에 대한 정의다. 비극,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와 같이 고대 그리스비극의 전성기, 아테네 시민에게 사랑받은 극작가의 작품들은 위와 같은 공식으로 꿰어질 수 있노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귀납적 연구서 『시학Poetica』에 남겼다. 그런데 잠깐, 비극의 주인공은 어떠해야 한다고?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우리’는 누구이며 ‘뛰어나다’는 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인류 최초의 문학 비평서가 이처럼 쉬이 합의하거나 폐기하기에는 너무도 느슨한 정의를 남겼으니, 비극이 끊임없이 재고찰되고 그 유효성 또한 거듭 질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비극Tragedy』은 전작 『우리 시대의 비극론Sweet Violence: The Idea of the Tragic』에 이어 동시대 비극의 자리를 묻는 문학 연구서다. 이글턴의 논의는 예술 형식으로서 ‘비극’은 통용 가능한 추상적 형식이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고유한 조건 속에서 성립된 “문화적 형성물”이라는 정의에서 시작해, 과학과 계몽의 세례를 받은 근대가 도래하면서 ‘진정한 비극’은 불가능해졌다고 주장해온 수많은 논평가와 대화하듯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비극의 ‘생사 문제’가 진단된다. 이글턴의 진단은 ‘생生’. 고통과 슬픔이 있는 한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근대성은 비극을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변형시켰을 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실 이글턴은 근대성이야말로 비극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세계화된 행성[의] 빽빽한 연결망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원죄 감각이 복귀”하고 있으며, “이 행성이 인간의 궁극적으로 오만한 행동들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위기의식 또한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성의 어두운 유산이 그리스비극의 토대가 된 작고 긴밀한 ‘도시 공동체polis’의 조건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는 것일 터. 근대가 빚어 놓은 참담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비극이?번역가 정영목의 표현을 빌리자면?“지금 우리가 사는 곳의 중심 문제를 감당”하는 예술 형식으로 귀환하기를 추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폴리스의 문제와 정면 대결한 결과로 탄생한 고대 그리스비극 작품들을 통해 우리 시대 인류 공동체의 문제를 조망하는 것 또한 유의미한 기획이지 않을까?
ⓒ국립극단
국립극단이 2025년 10월부터 2년에 걸쳐 무대화할 예정인 <안트로폴리스 5부작Anthropolis I~V>은 위와 같은 질문에 응답하는 야심 찬 기획으로 읽힌다. 2023년 도이체스 샤우슈필하우스에서 5일간 관람해야 하는 ‘마라톤 연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 작가 롤란트 시멜페니히Roland Schimmelpfennig의 착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팬데믹이 상기한 것이 무엇보다도 전 지구적 연결성이라는 걸 기억할 때, ‘인류세’를 뜻하는 단어 ‘Anthropoza??n’과 ‘도시공동체’를 의미하는 ‘Polis’를 결합한 ‘안트로폴리스’라는 제목의 대작을 떠올렸다는 것이 참으로 절묘하게 다가온다.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절감하게 된 이 거대한 인류 공동체의 이야기를 해 보겠다니! 그러나 감탄은 잠시, 더욱 시간을 들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시멜페니히가 이 이야기를 위해 일련의 고대 그리스비극 작품, 특히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을 소환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멜페니히가 <안트로폴리스>를 위해 소환한 아이스킬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은 모두 테베의 왕가, 카드모스 가문에 관한 이야기다. 왜 아테네의 작가들이 테베 왕가의 이야기를 이토록 자주, 그리고 암울하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제기되지만, 숨은 의도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전해진 테베 소재 그리스비극 작품들은 창작자도, 관객도 이야기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여 작가들은 이야기의 외부인으로서 테베를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게 참혹하디 참혹하게 구성할 수 있었고, 아테네의 관객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평온하게 ‘인간성의 본질’ 등을 성찰할 수 있었을 터다.
허나 <안트로폴리스>를 마주한 우리는 그리 태평할 수 없다. “근원적 비극의 장radical tragic terrain”(프로마 제틀린Froma I. Zeitlin)이라고 불리는 아테네 극작가들의 작품 속 테베를 ‘인류세의 도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호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파괴된 옛 도시, 몰락한 도시 공동체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미래라는 무정한 예언. 다시 돌아온 비극에서는 그런 예언이 들리고, 그것을 애써 부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허나, 부인하려 들면 어찌될까? <안트로폴리스> 5부작의 첫 번째 작품 <디오니소스>는 답한다. 디오니소스를 부정하다 바로 그 디오니소스에 의해 광기에 사로잡힌 어머니의 손에 찢겨 죽는 펜테우스가, 그의 조각난 육신이 나의 최후임을 직감한다. 비극의 기원이 바로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친 제의로서의 노래’라고 하니 말이다. 심지어 <디오니소스>의 원작,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은 결말 부분이 유실되어 다른 곳에 인용된 것들을 모아 붙여놓은 것이 전해질 뿐인데도,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비극 작품에는 그 부분에 희생자에 대한 제의가 존재하는 데도, 시멜페니히는 메꿔 쓰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렇게 전해진 이야기가 인류가 지금껏 문명을 써온 방식이라는 선언처럼, 무정한 결말을 그대로 남겨둔다.
“문명은 내부적으로는 억압, 외부적으로는 정복으로 시작한다”(스탠리 다이아몬드Stanley Diamond)고 했던가. 테베에서 태어나 먼 여정을 끝내고 테베로 귀환한 디오니소스는 내부인이자 외부인인지라 한데 뒤엉킨 억압과 정복이 그를 뒤따른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의 멸절 없이는 탄생할 수 없고, 낡은 것 또한 추하기는 매한가지인지라 온전히 디오니소스를 비난할 수도 없다. 이야기의 시간과 우리의 현재 사이 반복된 억압과 정복을 기억하며 우리의 문명이 시작되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이다. 마치 새하얗고 커다란 황소의 모습으로 다가온 제우스를 따라 지중해를 건너 ‘문명의 시작’을 알린 에우로파가 떠나온 길을 돌아보듯, 무심하게 되돌아볼 뿐이다.
진정 비극이 이 시대의 핵심적인 예술 형식으로 귀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불길한 일일 것이다. 근대의 과학과 계몽, 민주와 평등의 기치가 실패했다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약속한 희망과 구원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설명할 길 없으나 돌이킬 수도 없는 결말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테니 말이다. 진정한 비극에 환각적 화해의 자리는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어떤 고전이 각색 없이 돌아온다면, 어떤 시대의 고유한 양식이 수정 없이 이 시대를 위한 예술 형식으로 복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비극일지도 모른다고 <안트로폴리스> 시리즈의 첫 작품을 함께 하며 생각했다. 때마침, 보이는 자리마다 반복되는 역사에 지독한 환멸이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이 세계의 몰락은 필연이라는 경고음이 쉼 없이 울리는 듯했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드라마터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