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말 대신
몸은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다. 마음 깊숙한 곳으로 침잠해
적확한 단어를 골라 써내려가는 문장은
담박한 만큼 읽는 이의 심상을 들여다보게
하고, 두근거림과 저릿함의 박동을
짚어나가는 선율은 예술가가 느낀 순간을
재생하게 만든다. 제멋대로 빚어나간
캔버스는 그 다양한 모양새로 하여금
마음먹기에 따라 사랑의 모양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정답이 있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짓은 그 마음을,
감정을 투명하게 비춘다.
몸짓이 담아낼 수 있는 사랑의 모양은
다양하다. 무대에서 몸은 사랑이라는
사건이 체현하는 장소이자 상황이 된다.
무대 위 무용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돼 춤춘다. 그것은 비단 주어진 이야기와
안무를 훌륭하게 구현하는 차원을 넘어
춤이라는 예술적 몸짓을 통해 인물을
체현하는 일이다.
발레는 여러 종류의 춤 가운데서도 사랑
이야기를 많이, 아주 전통적인 플롯으로
다루는 장르다. 감정 표현만 아니라
마임이라 불리는, 통용되는 춤 언어가
더해지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무르익지
않아 그려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몸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은 없다.
몸으로 그려낸 사랑은 너무나 솔직한 탓에
자칫 깨질 듯 연약하기도, 그러안기에
고통스럽도록 뜨겁기도 하다. 천상을
꿈꾸는 발레에서라면 사랑은 더욱이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소설로 출발해 연극·오페라 등 여러 예술
작품으로 변주된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
‘춘희’. 당대 사교계를 누빈 작가의 자전적
경험은 물론, 그가 마음을 품은 실존
여인이 뒤엉켜 완성된 소설은 현실의
어둠이 드리우나 낭만성 또한 간직한
이야기로 남았다. 상류층 남성들의 후원을
받으며 살아가는 코르티잔이라는 존재,
뭇 남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으나
단 한 사람의 진실한 사랑에 마음을
움직이고 마는 마르그리트가 주인공이다.
화류계를 주름잡던 마르그리트는
아르망을 마음에 두게 되면서 코르티잔의
삶을 그만두지만, 아들의 미래를 걱정한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이별을 택하고
과거의 생활로 돌아간다. 영원할 것
같던 마음이 바뀌어 자신과의 관계를
저버렸다고 생각한 아르망은 마르그리트를
매몰차게 대하는데, 결국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서야 여인의 진심을 알게 된다.
20세기에 기록된 최고의 발레 작품 중
하나인 존 노이마이어의 드라마발레
<카멜리아의 여인>1978은 뒤마 피스의
작품 ‘춘희’와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마농 레스코’를 적절하게 뒤섞어
드라마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작품에 맞는
음악을 새롭게 쓰기보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취사선택해 낭만을 강조했고,
의상· 무대 등을 통해 그 시절 파리의
풍경을 담아냈다. 클래식 발레의 문법을
지키면서도 극적인 아름다움을 배가하는
움직임은 궁정 시대에 태어난 발레가
오늘날에도 예술 춤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두 사람의 첫 번째 파드되. 아르망은
상체를 숙여 여성의 손등 혹은 발끝에
입을 맞추거나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춰 이동하고, 높게 뛰고 돌며 터져
나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한편
마르그리트는 코르티잔으로 살아가는
삶에 불현듯 등장한 진짜 사랑에
혼란스러운 듯 대체로 크고 직선적이며
상승하는 동작을 펼친다. 감정 앞에
사회적 계급마저 내려놓고 충실하게
구애하는 남성, 이와 대조적으로 관성에
저항하려는 여성의 모습은 이들의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으리라는 암시일까.
ⓒKiran West
연인으로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추는
두 번째 파드되는 간결한 피아노 선율에
한결 여유로운 호흡이 돋보인다. 두 사람의
몸짓은 손을 맞잡고 서로 몸을 기대거나
무게를 나누고, 여성을 높게 들어 올리거나
남녀의 신체를 교차해 그림을 그리는
뉘앙스다. 대화하는 춤이 아니라 공감하는
춤, 그리고 동작과 동작 사이에 부여된
약간의 여유에 감정과 연기가 스며든다.
이별한 뒤의 세 번째 파드되는 첫 번째
춤과 대구를 이루면서도 좀 다른 방향을
취한다. 마음만은 여전히 아르망에게
향하기에 마르그리트의 두 팔은 길게
뻗어나가지만, 한창 사랑을 나누던 시절
균형을 이루던 서로의 무게는 이제 틀어진
모양새다. 아르망은 이별을 고하는
마르그리트의 편지를 받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스스로를 학대하듯 폭주한다. 이를
바라보는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편지의
내용도, 편지를 써야 했던 마르그리트의
심정도 아니다. 오롯한 그의 감정,
공중에서 두 팔과 다리를 사방으로 뻗은 채
공간을 휘저으며 세상을 잃은 듯 춤추는
무용수이자 아르망, 남성의 마음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전에도 죽음에 불구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발레가 있었다.
꿈과 환상, 초자연을 향한 이상향을 품은
낭만발레의 대표작 <지젤>1841이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하게 태어났으나
숨 가쁘도록 춤추기를 좋아했던 시골
소녀 지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마을에 들어선 알브레히트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이후 그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충격에 숨을 거두게 된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 죽은 젊은 여성들의 혼령
윌리로 둘러싸인 무덤가.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지고지순했던 것인지
지젤은 죽어서까지 그를 지키고자
또 춤을 춘다는 이야기다.
<지젤>에서 첫눈에 반한 남녀의 애정
전선은 쉽사리 춤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축제 분위기의 1막이 아니라, 오히려
핏기 없는 무채색의 윌리들이 등장하는
무덤가의 2막이야말로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을 발견하는 공간이 된다.
낭만발레의 상징과 같은 ‘발레블랑Ballet
Blanc(백색발레)’은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새하얀 튀튀를 입은 여성
무용수들의 모습에서 기인하지만, 사실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스무 명 가까운
무용수가 숨 가쁘게 고도의 테크닉을
반복하는 데서 완성된다.
윌리들에게 춤은 무덤가를 찾은 남성을
단죄하는 수단이다. 뛰고 돌기를 반복한
끝에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과정은
남성에게 되묻는다. 진정이었느냐고.
한편 알브레히트를 구원하고자 동이 틀
때까지 미르타에게 머리 숙이고 명령에
따르는 지젤의 미친 몸짓은 남성의
배신으로 정신을 잃고 춤추던 1막의
모습과 겹쳐진다. 마음을 다했으나
그 끝에 마주하게 된 고통마저도 지젤이
감내한 사랑이었을까. 비극은 도래했고,
그제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허상을 껴안고자 계속해서 어긋나는
알브레히트의 몸짓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의 헌신을 상기한다.
낭만발레와 드라마발레를 대표하는
두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4월 18일부터 27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국립발레단 <카멜리아 레이디>
5월 7일부터 11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글 김태희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