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깨우고, 꿈꾸게 하는
시간의 정원
예술의 숨결이 공간에 깃들 때
지난했던 겨울의 끝자락, 머리와
마음을 정화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정원이 열린다. 《탐닉의 정원》,
《미셸 앙리: 위대한 컬러리스트》,
《아트 주얼리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은 흑백의 명료함,
생동하는 색채, 그리고 꿈같은 이상을
통해 정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본질을
돌아보게 하고, 감각을 일깨우며,
희망을 꿈꾸게 하는 이 전시들은 정원을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이상을
투영하는 창으로 탈바꿈한다.
얼마 전, 길 위에서 하염없이 내리던
새하얀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눈앞에 있던 피사체가
무채색의 잔상으로 날카롭게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아주 잠시
두려움이 밀려온 것이 사실. 아마
‘시력에 문제가 생겼나?’라는 불안감
탓이겠지. 그러나 눈이 본래의 색을
되찾고 마음이 평안해지자,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가끔은 흑백의 명확함이
머리와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복잡한 일상을 치유하는
열쇠가 될 테니까.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진행
중인 김병호의 《탐닉의 정원》(2월
8일까지)은 단순함이 주는 평온함을
오롯이 체감할 수 있는 풍경을 펼쳐
보인다. 화이트큐브 안에 무채색
금속들이 꽃망울마냥 자리잡은
작가의 작업은 현대 사회의 일면을
투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박미란 아라리오갤러리 팀장은
“김병호의 조형언어는 기계 문명과
자연 세계의 원리를 섬세하게
중첩한다. 인위적 공정에 의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조형의 최소
단위들은 세포가 생명체를 구성하듯
형상이 되고,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루듯 복합적 풍경을 구축한다”고
덧붙인다. 전시장을 수놓은 15점의
조각은 탄생의 찰나를 정지시켜 놓은
모양새다. 예컨대, 아홉 개의 단면이
반사와 투영을 주고받는 <아홉 번의
관찰>2024과 산발하는 타원형 구체로
이뤄진 <57개의 수직 정원>2024은
세상의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존재의
역동성을 묘사한다. 또 가느다란
금빛 가시들이 솟아오른 <323개의
가시>2024는 지금을 살아가는 혹은
이겨내려는 우리의 움직임과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일까. 《탐닉의 정원》은
1차원적인 형태의 미학을 넘어,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읽힌다. 다시 말해,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는 뜻.
《탐닉의 정원》이 흑백의 명료함으로
세태를 짚어보게 한다면,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 《미셸 앙리:
위대한 컬러리스트》(3월 16일까지)는
생동감 넘치는 색채를 통해 보는 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각을 일깨운다.
전시는 그야말로 ‘꽃에 의한, 꽃을 위한,
꽃의 자리’다.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꽃으로 가득한 전시실은 금속이 주는,
계절이 내뿜는 냉기를 온기로 감싸며
관객을 따뜻하게 맞이한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을 꽃과 함께 보냈다.
꽃의 색, 향기, 그들의 생명력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컬러는 꽃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꽃을 자주 그리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 꽃의 색이며,
꽃의 표정에서 향기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라는 작가의
말마따나, 미셸 앙리Michel Henry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자신만의 색채로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펠탑과
아이리스>, <이즈미르에서의 정박>,
<파트리시오의 창문> 등)은 창가에
놓인 꽃병과 창밖의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진 까닭에 자연과 인간이 가진
조화와 생명력을 탐구한 화법의
결정체로 평가받는다. 특히 꽃잎을
표현한 입체적인 마티에르matiere와
평면적으로 처리된 주변부의 대조는
꽃의 생명력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며,
감각적 깊이를 더한다. 이와 같이
꽃을 강조한 미셸 앙리의 기법은
감동적인 경험을 끌어내는 동시에
우리의 내면을 어루만져 존재의
아름다움과 삶의 가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롯데뮤지엄의 《아트 주얼리: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3월
16일까지)은 앞선 두 전시와는 다른
차원의 정원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 그리는
비밀 공간이다. 보석이 주인공인
이 빛나는 정원은 고대와 현대,
자연과 인간의 교차점과 다름없다.
‘예카테리나 2세와 17~18세기 유럽의
주얼리’, ‘아르누보’, ‘벨 에포크’,
‘아르데코’ 등으로 구성된 전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라이빗
주얼리 컬렉션이자, 가장 중요한 역사
주얼리 컬렉션’으로 불리는 아리카와
카즈미Kazumi Arikawa 컬렉션 208점을
선보인다. 5천 년에 걸친 인간의
예술과 역사를 품은 컬렉션은 인간
문명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
건축가 쿠마 겐고의 디자인은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는 밤하늘에
흩어진 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무광
텍스처와 은은한 조명을 활용해
보석의 디테일과 광채를 극대화했다.
더욱이 입구 로비에는 보석의 결정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오브제를
설치해 빛과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는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이에
따라 관람객은 반짝임으로 점철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된다. 고뇌와
고통이 사라진, 오로지 희망과 환희로
가득한 그런 세계를.
전시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주요
작품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시그넷 반지,
르네상스 거장 발레리오 벨리의
십자가,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지란돌 귀걸이, 나폴레옹이
바사노 공작에게 선물한 카메오
브로치를 꼽을 수 있다. 인간의
이상과 아름다움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형태를 갖추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
이토록 매력적인 《아트 주얼리: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을
보노라면, 전시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이 선물한 원석이 인간의 손을
거쳐 예술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희망과 아름다움이 완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 아닐는지. 그렇기에
전시는 꿈에 그리는 정원처럼 잠시나마
이상적인 세계를 현실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글 박이현 럭셔리 매거진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