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한 안무에 생명 불어넣는 건
우리들이지
‘세마sema’를 아시나요? 이슬람 신비주의 전통인 수피즘의 종교의식입니다.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높은 모자를 쓴 수행자가 오른손은 하늘로, 왼손은 땅으로 향해 뻗고 머리를 지구의 자전축만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신과의 일체감을 추구합니다. 빙빙 도는 모습으로 인해 흔히 수피 댄스Sufi dance라 불리지만 춤이라기보다는 종교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무인 것은 확실합니다.
안무choreography는 움직임을 구조화하는 행위입니다. 모호하고 유동적이며 광활한 움직임에 질서를 부여하고 체계를 세우는 일입니다. 안무는 역사적으로 춤과 긴밀한 개념이지만 반드시 춤에만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의 무용학자들은 통념적인 안무, 즉 춤 동작을 하나하나 연결하는 행위뿐 아니라 움직임을 조직하는 모든 행위를 넓은 의미의 안무라 봅니다. 세마처럼 춤으로 분류할 수 없는, 그러나 춤과 유사한 행위를 비롯해 군대의 행렬이나 철새의 이동, 반려동물의 훈련처럼 춤과 전혀 닮지 않는 움직임에서도 안무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안무를 경험하고 수행해왔습니다. 국민체조, 좌측통행, 한 줄 서기 모두 일종의 안무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수업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기라고 하지요. 수업의 목표는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참아내는 안무를 몸으로 익히는 것입니다. 앉아 있기는 사회적 질서와 문명, 혹은 훈육과 통치를 위한 안무의 첫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안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자신을 통제해야 합니다. 손 들고 벌서기는 아마도 아이들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강력한 안무일 것입니다. 팔이 저릿저릿해도 내릴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울음을 터뜨리지요. 벽 보고 서 있기나 생각의자에 앉아 있기 등도 정적이지만 억압적인 안무입니다. 주어진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게 강제하는 힘은 신체·정신적 고통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모든 안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예측 가능한 안무는 즐거움과 해방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에 전 세계를 강타한 춤 마카레나macarena를 떠올려봅시다. 16박자 동안 두 팔을 앞으로 폈다가 차례로 접는 안무로, 16박자마다 1/4바퀴씩 몸 방향을 회전해 64박자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기차놀이 하듯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이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면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군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동작구를 반복하며 대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라인댄스나 포크댄스의 기본 원리입니다.
오늘날 춤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구조를 띤 안무도 많지만 납작하고 단순한 안무 역시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1초에 서너 동작씩 하는 화려한 안무에 열광하는 동시에 지극히 쉽고 반복적인 안무를 끊임없이 수행해왔습니다. 꼭짓점댄스, 제로투댄스, 치실춤, 트로피카나 등의 춤 혹은 춤이라 할 수 없는 율동이 밈이 되어 주기적으로 유행했습니다. 이들 안무는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개념을 응용하자면) 뜨거운 안무가 아닌 차가운 안무, 혹은 (미디어아티스트 히토 슈타이얼의 개념을 응용하자면) 고해상도의 안무가 아닌 빈곤한 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무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건만 왜 빈곤한 안무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혹은 현란한 안무의 시대에 빈곤한 안무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예측 가능한 안무는 우리를 옭아매는 동시에 해방시켜 줍니다. 근대인인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개인이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택지가 너무 많은 현대 사회에선 선택의 무한함이 압박이 됩니다. 이에 구조에 자신을 맡길 때 개인은 결정과 책임의 부담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춤을 출 때 내가 나의 모든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야 한다면 누군가는 자유로움을 느끼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감히 움직일 엄두를 못 내겠지요. 이때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안무를 따라 하는 것은 부담을 덜고 움직일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구조, 특히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예측 가능한 구조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역설은 꼭 안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학생이 된 이후부터 콩 껍질 까기나 멸치 다듬기, 설거지 등 가사를 좋아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공부보다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예측 가능한 노동에서 휴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현대인이 뜨개질이나 컬러링 북에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 할 수 있겠죠.
단순하고 반복적인 안무가 주는 자유와 해방감은 종교적 수행이나 명상과도 연결됩니다. 각종 종교의식을 살펴보면 두 팔을 들고 빙빙 도는 세마를 비롯해 세 걸음마다 한 번씩 절하는 삼보일배, 염주나 묵주의 구슬을 한 알씩 넘기는 기도 등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안무가 많습니다. 이는 반복적인 신체 움직임에 집중함으로써 잡념과 번뇌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나 의미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란 이토록 어렵기만 합니다.
나아가 빈곤한 안무는 집단 간 연대를 강화시켜주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라인댄스처럼 단순하고 반복적인 안무가 빠지지 않는 이유는 이질적인 주체가 구조에 맞춰가는 행위를 통해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원래의 안무가 지닌 의미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기도 합니다. 흥겨운 민속춤이 서글픈 저항의 춤이 되기도 하고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던 춤이 더 다양한 사람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결국 안무는 움직임 구조이고 그 구조는 빽빽하거나 성글기 마련입니다. 이를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글고 빈약한 안무가 지닌 힘과 자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안무는 구조일 뿐이고 구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은 행위자의 몫입니다. 매클루언이 정보로 가득 찬 뜨거운 미디어보다 차가운 미디어가 이용자의 참여도를 높인다고 말한 것처럼, 납작한 안무에 풍부한 의미를 더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글 정옥희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