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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S+

10월호

예술가의 진심 영원히 나이들지 않는 예술가

김윤신

“나무는 바로 나예요.”

91세에 전기톱 들고 나무를 자르는 현역 조각가가 말했다. 구순에 전성기를 맞은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나무가 좋아서” 40년간 한국을 떠나 아르헨티나에서 작업했고, 다시 한국에 정착한 지금도 눈을 뜨면 나무부터 만진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더불어 살았고, 자연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요. 나는 톱질을 해야 몸이 안 아파요.”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만난 그가 풍성한 백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원조 걸크러시’ 매력을 발산했다.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그윽한 나무 향이 훅 들어왔다. 육질 단단한 나무 조각들, 작업을 기다리는 원목이 공간 가득 늘어서 있었다. 작가는 “이 나무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며칠 동안 보다가, 딱 느낌이 왔을 때 톱을 들고 거침없이 공간을 만들어 간다”며 “일단 잘라내야 그다음이 보인다”고 했다. 그 과정을 그는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재료와 내가 하나가 되어合 작품이라는 또 다른 하나가 탄생分한다”는 의미다.

지금도 왕성하게 작업할 수 있는 체력의 비결이 뭔가요.

나는 쉼 없이 작업해왔기 때문에 톱질을 해야 몸이 안 아파요. 나무하고 톱은 내 몸과 같아요. 젊었을 때는 모형도 만들고 스케치도 해놓고 작업했는데, 어느 시기가 되니까 그게 필요 없어졌어요. 그냥 정신이 딱 집중됩니다. 아무 생각이 안 나요. 톱과 내가 하나가 돼 나무에 거침없이 공간을 만들어가요.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작업)해도 배도 안 고파요.

별도의 스케치나 구상을 거치지 않고 작업을 하시네요.

톱을 들기 전에 나무를 굉장히 많이 바라봐요. 오래 가는 건가, 어떤 향이 나오나, 결은 어떻게 됐나…. 껍질도 좋은가, 물기는 어느 정도인가. 나무가 가진 여러 가지 성질까지 다 느끼면서 작업을 하는 거죠.

김윤신은 193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자랐다. 나무를 솟대처럼 쌓아 올린 초기작 ‘기원쌓기’ 연작은 유년기 기억과 맞닿아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오빠 김국주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엄마는 새벽마다 장독대 옆에 물을 떠 놓고 기도했다. “내가 돌을 주워다 쌓으면 엄마가 초를 세워두고 두 손을 모아 빌었어요. 엄마의 간절한 염원에서 작품이 나온 것 같습니다. 미술이 단순히 형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정신과 혼이 드러나는 것임을 나중에 깨달았죠.”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69년 귀국해 상명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74년 한국여류조각가회 설립을 주도했다. 1983년 12월 김윤신은 “이곳 나무가 기차게 좋다”는 조카의 말에 이끌려 아르헨티나를 찾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과 숲, 아름드리나무가 나를 멈추게 했어요. 여기 재료로 1천 점을 만들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결심했지요.”

그는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지위도 내려놓고 그곳에 정착했다. 돌처럼 단단한 남미 나무와 씨름하다 찾아낸 도구가 전기톱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알가로보·라파초·칼덴·케브라초 같은 원목이 그의 손을 거쳐 원초적 생명력 물씬한 조각으로 탄생했다.

나무 때문에 이주를 결심했습니까.

아르헨티나 조카 집에 놀러 갔는데, 아름드리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었어요. 단단하니 너무 좋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엔 굵은 나무가 없었어요. 대사관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가 ‘이 나라에서 전시하고 싶다’고 했죠. 관장님이 작품을 보여달라고 하시더군요. 두 달 달라고 했습니다. 현지 나무로 두 작품을 끝냈을 때 관장님이 와서 보고 감동하시더군요. ‘30년 관장 생활을 했지만 껍질을 붙인 채로 속살과 겉살의 공간에 차이를 두면서 만든 작품은 처음 봤다’면서. 미술관 야외에서 전시가 열렸고, 반응이 뜨거웠어요. 여기저기서 전시 요청이 이어졌습니다.

안정된 교수직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선택의 갈림길에 섰죠. 예술가가 될 것인가, 교수로 남을 것인가. 그때 결정했습니다. 나는 예술가로 남을 거라고.

전기톱과의 인연도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그냥 활톱으로 잘랐어요. 작업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길거리에서 나무를 잘랐는데, 동네 사람들이 전기톱을 쓰라고 추천하더라고요. 나무에 온갖 돌을 자르며 실험에 매진했어요.

원산·안변·서울, 프랑스 파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멕시코, 브라질, 다시 한국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동했습니다.

이렇게 해야겠다, 저렇게 해야겠다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죠. 나는 오직 내 일만 했어요.

초기작 ‘기원쌓기’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서 출발했는데, 구순 넘은 지금의 작업도 어떤 대상을 향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나요?

젊을 때는 기원이라고 생각했어요. 간절한 기도를 추상의 형태로 표현해야겠다고 느꼈죠. 내 속에서 쌓이고 쌓이는 생각의 움직임이 탑처럼 올라오게 된 건데, 지금은 형태적인 것도 그렇고 꼭 이렇게만 해야겠다가 없어요.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 같아요.

3년 전인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가 소위 대박이 나면서 국제 미술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한국에 이런 조각가가 있었다니….’ 평단과 언론, 시장이 열광했다. 한국 대표 화랑인 국제갤러리와 세계적인 미국 화랑 리만머핀이 동시에 러브콜을 보냈고, 두 곳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 2024년 세계 최대 미술 축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초대받은 데 이어, 지난 봄엔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생애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1982년 개관한 호암미술관이 한국 여성 작가의 개인전을 연 건 처음이었다. 당시 호암미술관은 김윤신에 대해 “한국적 감성과 동양적 사유를 기반으로 남미의 자연과 문화를 흡수하며 구축된 매우 독자적인 작품”이라며 “톱질과 망치질 자국으로 가득한 조각은 동시대 미술에서 경험하기 힘든 ‘작가’라는 존재를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나무는 평생을 함께한 재료인데, 나무의 매력이 뭔가요.

재료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 절단했어도 썩지 않는 한 나무는 살아 있는 거예요. 나무는 어렸을 때부터 내 친구였어요. 금강산 가까운 안변에서 살던 어린 시절, 학교까지 십 리를 걸어 다녔죠. 주변에 친구가 없으니 자연과 더불어 놀았어요. 산과 들과 벌판과 논밭… 모든 게 다 내 친구였어요. 자연과 더불어 커서 지금까지 이렇게 나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한국 나무로 작업하시나요?

한국 나무는 연하니까 작업이 아주 순해요. 아르헨티나 나무는 돌처럼 단단해서 전기톱 체인이 빠르고 세차게 돌아가거든요. 자를 때의 감정과 나무가 변하는 순간, 소리, 모든 것이 하나가 돼 나오는 쾌감이 있는데, 한국 나무는 물렁물렁해서 톱이 들어가는 순간 어느새 잘려 있어요.(웃음)

그의 작품은 쪼개진 나무의 껍질과 속살이 하나로 상승하는 형태를 띤다. 톱질을 통해 드러나는 나무의 속살과 원래 모습 그대로 살려둔 나무의 거친 껍질이 시각적 대조를 이룬다. 멕시코·브라질 채석장에서 만난 돌 조각, 2000년대 이후 채색 조각도 김윤신 작품의 한 축이다. 남미의 토속성·원시성, 한국의 오방색이 만난 원색의 회화도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남미와 한국이 회화 안에서 독특한 조화를 이룹니다. 의도한 건가요?

자연적으로 환경이 나한테 스며드는 것 같아요. 한국에 다시 정착하고 나서 남미에서 근무하던 지인이 엽서 한 장에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인디언 후손들이 옷을 입지 않고 몸에 화려한 색을 칠하고 다닌다는 걸 듣고 떠올렸습니다. 우리 한국의 오방색에 남미의 원초적인 색감을 더해서 조각에 그림을 넣어봐야겠다고 시작했어요.

구순 넘어 스타 작가가 되셨습니다.

사람이 만든 일이 아니에요.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나를 이렇게 인정해주시니 너무 고마운데 아직 멀었어요.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작업을 하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보니까 너무 많이 달라진 걸 느껴요.

뭐가 다른가요?

모든 것이 정말 빨라졌어요. 내가 떠날 때는 전쟁 후 복구도 제대로 안 됐을 때예요. 5년마다 한 번씩 작품을 들고 와 한국에서 전시회를 하긴 했지만…. 지금 한국은 세계로 뻗어나가는 젊은이들의 활약이 대단하고 에너지가 느껴지죠. 내 나라 오니까 마음도 편안하고 좋죠. 그런데 나는 어디를 가나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 내 집이고, 고향이에요. 지금도 눈 뜨고 밥 먹으면 바로 작업을 합니다.

슬럼프가 한 번도 없었나요?

난 그런 거 몰라요.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가면서 오빠와 약속했거든요. 독립투사 출신의 오빠가 ‘네가 유학을 떠나면 결혼은 하기 힘들 거다. 혼자 살 인생을 대비하고, 나이 들어서 조카들에게 신세 지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 ‘그러겠다’ 약속하고 다 버리고 떠난 거예요. 오빠하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오로지 이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에 딴 데 한눈팔지 않고 여기까지 왔어요. 에너지는 정신적인 문제예요.

지난 6월 폐막한 호암미술관 회고전엔 수많은 MZ 세대들이 다녀갔다. 20~30대 여성들은 특히 전시에서 상영된 17분 남짓한 영상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파주 작업실에서 여전히 작업을 계속하는 작가의 일상과 지구 반대편의 이국,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이어지는 궤적이 교차 편집돼 흘러간다.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그는 말한다. “딱 105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그때까지 하면 누가 봐도 ‘이거 김윤신이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는 ‘김윤신다운’ 작품을 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내가 유럽에서도 있었고, 아르헨티나·멕시코·브라질에서도 작업했지만, 뭘 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구 걸 보면 영향받으니까 보지 않습니다. 누가 봐도 ‘이 작품은 오로지 김윤신’ 하는 작품을 끝까지 해놓고 가야 하니까 쉼 없이 해야 해요.”

삶을 개척해온 1세대 선배 예술가로서 후배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갑자기 뭐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 꾸준히 그냥 자기 것을 찾아가야 뭐가 보일 겁니다. 어느 정도 나를 희생해야 해요. 다 즐기고 어떻게 찾습니까? 희생하지 못하면 적절한 선에서 끝나는 거고.

‘매운맛’ 조언을 날린 선배가 ‘이 말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요, 지금까지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았어요.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아요.”

신당창작아케이드 마스터피스 토크 <한 작품은 어떻게 시대가 되는가> 10월 31일 오후 2시 | 서울공예박물관 교육동 강당
조각가 김윤신&입주작가 이시평·이승진·김도영

글 허윤희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사진 Studio K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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