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청, 물처럼 흐르는 연극을 꿈꾸다
연출가 신유청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그가 무대에 올린 작품의 목록일 것이다. 시간을 점프하며 입센의 인물들과 둘러싼 세상을 확장한 <와이프>2019, 그리스비극을 닮은 가족사에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투영한 <그을린 사랑>2016, 세기말 미국의 혼돈을 21세기 서울에서 감각하게 해준 <엔젤스 인 아메리카>2024…. 중·대극장에 연극을 올리면서 작품의 흥행과 내용적 성취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관객과 평단이 모두 차기작을 기다리는 연출가는 귀하다.
최근 성북구 서울연극창작센터에서 만났을 때, 그는 조승우가 주연한 <햄릿>2024의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바로 사흘 뒤부터 연극 <테베랜드>2024의 새 시즌을 시작해 궤도에 올려놓은 참이었다. 이 센터의 2025년 3월 개관 전 프로그램에 참여해 ‘연출가의 시선’을 주제로 한 강연도 앞두고 있었다.
시의 심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울컥하더라고요. 지금은 삶의 형태가 많이 바뀌었지만, 언젠가 그때가 문득 생각나면 또 한 번 보게 될 것 같아요.”
강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생각인가.
연극 연출하는 친구들일 테니까,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 연극이 뭘까, 이런 고민을 같이하고 싶다. 수업을 하면 기능적으로 무슨 ‘연출 비법’ 같은 걸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거 말고, 연극은 무엇이며 왜 우리는 연극을 떠나지 못하는지에 관해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왜 연극이 좋은 걸까.
공연을 올리고 제일 기분 좋은 때는, 공연하면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나눈 매우 많은 이야기 안에 관객들의 감상평이 놓여 있을 때다. 공연 전 두 달여 배우와 스태프의 노력은 큰 그릇을 만드는 것이고, 그 안에 관객의 사유가 담긴다. 우리가 만든 세계를 관객들은 언어화해 평을 쓰는 것 아닐까. 그런 마음을 만나는 순간은 늘 경이롭다.
관객 평을 참 소중히 여긴다.
<그을린 사랑> 공연 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숙제 내듯 A4 용지 1장 넘는 긴 관객 평이 여럿 나왔다. ‘표현하고 싶은 삶의 무언가를 읽어 갔구나’, ‘연극을 통해 무언가 순환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했다. 작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쭉 옮겨와 연극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걸 수행하는 메신저였고, 관객들이 그걸 읽어낸 거다. ‘아, 되게 아름다운 선순환이다’ 생각했다.
연극이란 순환하는 것?
마치 비가 내리는 것, 물의 순환과 같다고 생각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 않나. 물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작가에게 영감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번에 한강 작가가 말했듯 그걸 언어로 옮기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그 언어는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가장 약한 사람에게로 간다. 또 물은 흐르면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땅의 모든 것을 씻어내고, 깨끗이 하면서 흐른다. 그 지나간 곳에 식물의 싹이 트고 동물이 마신다. 물은 계속 더러워지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게 냇물과 강물이 바다로 도착하면 태양 빛을 받아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연극도 비슷한가?
결국 우리는 전부 그 안에 있다. 작가가 이 세계를 관찰해 써낸 것과, 연극하며 그것을 흘려보내는 우리가 있다. 실은, 연극 만드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삶의 언어를 배우고 해내느라고 고통스럽고, 두 달간 자기 몸을 버려가면서 무대 위에 제물처럼 올라가는 거다. 물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지 않나.
물처럼 흐르는 연극이라니.
연극이라는 물의 방향을 바꾸거나 고이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오히려 통로가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나와 우리 작품을 통해 연극이 관객에게 잘 흘러가고, 관객들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연극을 통해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치 바다로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래서 ‘공연하는 사람들이 깨끗해야겠구나’ 생각한다. 극장에는 스피커가 있다. 좋은 스피커가 되려면 잘 비어 있어야 한다. 배우도 나도 좋은 스피커처럼 잘 걸려 있는 통로로써 존재해야 한다. 근데 살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이 공연 통해서 떠야지, 뭐 이런저런 욕망에 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작품이 휘어지고 고이게 되는 것 같다.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매달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못 떠나는 걸까?
사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 이유를 모른다. 그런데 배우들은 지나치게 자기 존재 이유를 묻는다. 등장 이유, 이 대사를 치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그러면 연출은 설명해줘야 하는데, 본인들 살아가는 이유는 모르면서 등퇴장과 대사의 이유는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안다고 해서 딱 떨어지게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명을 안 할 수도 없다.
이 세상 속 연극의 말
그렇게 보니 삶과 연극이 닮았다.
배우들을 만나며 연극을 한다는 것이 사는 것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의 삶은 이러저러해서 의미가 있어’. 그렇게 내 존재의 의미가 꽉 차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반면 내 삶이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때도 있다. 결국 연극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정말 좋은 희곡은 티끌처럼 작은 어느 지점에선가 작가가 왜 이걸 썼는지 찾아낼 수 있다. 쉼표 하나, 빈칸 하나로 의미가 발생한다. 그래서 재공연이 좋다. 처음엔 잘 안 보이던 의미가 재연, 삼연 하다보면 작가가 그렇게 쓴 이유가 더 잘 보이게 된다. 내가 놓친 것과 실수한 것들을 만나고, 작은 메시지, 침묵, 사이, 쉼표, 줄임표, 느낌표 같은 데서 작가의 설계가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다.
그 의미를 위해 고통을 견디나.
연극 속에선 내가 일찍 죽어도 커튼콜에 다시 살아나서 관객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고통을 참아낼 수 있고, 신나게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우리 삶은 그렇지 않다. 사는 이유도 모르고, 헤어지면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보고 돌이켜보면 다 알 수 있지 않을까. 엔딩에 미리 가보면 다 알 수 있지 않을까. 커튼콜 때처럼 적도 친구가 되고, 그렇게 다시 만나서 손을 잡고 함께 박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알 수 없음’에 휘둘려 무의미로 빠지기도 하고, 잠시의 행복에 매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지구가 둥글고 자전과 공전을 하는 걸 감각할 수 없다. 너무 거대하니까. 하지만 연극은 지구가 돌고 있구나, 둥글구나 하는 걸 두세 시간 안에 느끼게 해준다. 마치 유사 전능성을 감각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극이 완벽히 삶인 것은 아니다.
나는 연극이란 완성도 면에서 늘 떨어지는, 부족한 작품 만이 무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에 하면 어떻게든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삶에 비해서는 늘 모자라고, 유사품이니까. 게다가 충분하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는 데도 관객들은 또 그걸 좋아해주신다.
불완전해서 더 애틋한 것일 수도 있겠다.
사실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햄릿을 연기했을 때 관객이 환호와 찬사를 보낸다 해도, 본인 마음속에는 내가 완벽한 햄릿이 아니라는 걸 안다. 완전하지 못한 것을 알지만 관객은 그렇게 바라봐주고, 햄릿 대신 찬사를 받는 거니까. 무대 위 배우는 그래서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고 관객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겸손은 요즘 귀한 미덕이다.
나는 이번 <햄릿> 때 조승우 형 커튼콜을 보는 게 좋았다. 형이 내려올 때 하는 손짓이 있고, ‘감사합니다’ 하고 속삭이는 걸 입 모양으로 알 수 있다. 그때 그 감정이란, 모두가 완벽하다고, 진짜 햄릿 같다고 하지만, 승우 형 마음에는 허전함과 부족함이 있는 거다. 집에 가면 또 머리를 싸매고, 엄청나게 메시지를 보내온다. 작가와 얘기해서 또 수정한다. 내가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생각할 때조차, 공연 중에도 승우 형은 완전함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사람이란 본래 존재의 무언가를 비추고 담아내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미완성의 존재인 것 같다. 그래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 아닐까.
햄릿, 다시 하고 싶은가.
공연은 아이 키우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일단 무대에 올려놓고 나면 성장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 억지로 고치려 하면 뒤틀릴 수도 있으니까. 막상 또 하려고 하면 무지 힘들다. 아예 모르고 부딪치는 것과, 이미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은 또 더 힘들다. 그런데 <테베랜드>나 <빈센트 리버>2021처럼 한 시즌이 끝나면 한 번 더 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공연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한 번 끝나면 끝이지만, 연극은 다시 곱씹어서 볼 수 있다는 것, 레퍼토리가 된다는 게 장점인 것 같다. <햄릿>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한테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모르지만 조금 세월이 지난 뒤면 좋겠다. ‘아, 이래서 그랬구나’ 하는 것들이 생겨나면,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면, 부족한 부분, 완전히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부분들이 보인다면….
무대도 채우기보다 비우는 쪽인 것 같다.
그 얘기를 하려면 긴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한참 연극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시절, 우연히 ‘한국창작예술아카데미’라는 지원사업 공고를 봤다. 나이 제한이 40세, 딱 막차였다. 마지막으로 지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극과 연을 끊고 허송세월하다보니, 연극에 대한 다른 시선들이 들어왔다. 이야기의 본질에 집중하는, 잘 들리는 연극을 하고 싶었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건 잘 들리게 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되더라. 예전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나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면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다. 사람에겐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지 않나. 그래서 ‘들리는 연극을 해 보고 싶다’는 콘셉트로 지원했다.
보이기보다 들리는 연극이라니.
시각적으로 현란한 것들은 사람을 현혹하지 않나. 정말 깨끗이 비워진 가운데 잘 들리는 연극, 결국엔 침묵이 주는 진리를 만나는 연극을 하고 싶었다. 참 막연한 얘기였는데, 심사위원들이 뽑아주셨다. 매달 책을 사거나 공연을 볼 수 있는 지원금이 30만 원 주어졌는데, 온통 책, 특히 종교서적을 엄청 사서 읽었다. 그러던 중에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혼자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보고 명동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연극 <햄릿>이 끝난 뒤 텅 빈 객석에서 바라보던 침묵을 기억했다. <그을린 사랑>은 고통스러운 운명 속에서, ‘1 더하기 1은 1’이 되는 순간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의 이야기다. 대본을 구해 읽고, 작가에게 연락한 뒤 혼자 라이선스까지 해결해서 20분짜리 쇼케이스를 했다. 끝나자마자 심사위원이던 고선웅 연출님 말이 기억난다. “야, 나 이거 더 보고 싶다.” 그 말이 너무 기뻤다.
그 말이 연극쟁이 신유청을 되살린 셈이다.
정말 고마운 선생님들이다. 그때부터 굉장히 넓어지더라.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 왕립발레학교 입학을 허가받고 복싱장에 온 빌리에게 코치가 말한다. “이제 네가 여길 떠나면 여기서 네가 배운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 될 거야”라고. 모든 순간이 계획해서 된 것도, 뜻대로 된 것도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전에는 연출가의 선택이 전부 옳아야 하는 연출을 했다면, <그을린 사랑>부터는 한 사람 한 사람 만남을 통해 연극이라는 사건이 펼쳐지더라. 안무가 이소영, 의상 디자이너 홍문기, 번역가 겸 조연출가 김진숙, 음향 디자이너 지미세르, 조명 디자이너 강지혜처럼 함께해주시는 분들을 만났다.
신유청 연출 하면 ‘소수자’, ‘운명’, ‘비극’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코미디를 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니까.
내가 해온 작품이 공통으로 인간의 고통을 다루고 있는 건 맞다. 왜 인간은 사는 동안 이렇게 고통을 통과해야만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는가를 묻는 것 같다. 특별히 소수자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나니까. 그러고보니 그 한계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그동안 해온 작품 안에 다 있었던 것 같다. 연극을 하는 우리한테는 세상과 싸울 수 있는 무기가 작품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연극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나.
싸움꾼 기질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은 세상과 싸우기보다 메시지를 발신하는 쪽을 원하는 것 같다. 누굴 바꾸려고 하면 네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싸우게 된다. 그보다 연극은 경험인 것 같다. 책은 책으로 끝나지만, 연극이라는 양식이 너무 좋은 건 그 이야기를 살게 해주는 것,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신학이든 철학이든 말하는 것들은 결국 인간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경험 안에 다 존재하더라. 경험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더라. 연극은 그렇게 의미 없이 떠돌던 말들에게 집이 되어준다. 그래서 앞서 말한 순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다 집 없이 떠도는 말들인데, 연극 무대에선 그걸 마찰과 갈등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헛된 말이 되지 않게 해준다.
나는 연극을 보고 사람들이 나뉘는 게 싫다. 연극이 좋은 건, 커튼콜 때 함께 박수를 보내듯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다는 것 같다. 갈대를 보라. 하나만 흔들리지 않는다. 다 같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게 갈대숲이 되고, 거센 바람을 견딘다. 공연은 관객이 와서 함께 본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다. 연극 하는 사람으로서 큰 목표가 있다면, 우리가 하는 공연이 평화를 이뤄내는 일이면 좋겠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동등한 존재구나, 함께 있는 존재구나, 함께 살아야겠구나, 그런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 그런 메시지가 연극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인 것 같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