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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예술인 아카이브 서윤후

서윤후
b.1990
문학/시·산문
2025 웹진 [비유] 편집위원
2017·2019 문학창작집발간지원사업
2017 서울청년예술단
2014 연희문학창작촌 입주작가

시인 서윤후입니다. 가을을 세어보기에 좋은 날씨를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그렇습니다. 시와 산문을 포함한 여러 집필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어요. 몇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고, 현재 웹진 [비유] 편집위원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출판사 아침달에서 한국문학을 편집하는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고요. 문학과 책 곁에서 주어진 일들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궁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말하는 일이 아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로 저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였던 것 같아요. 말 주변이 부족하고 내성적인 성격 덕분에 제 안에 쌓이는 말이 많아요. 제게 발언권을 내어주는 일로써 자연스럽게 쓰는 일을 하게 됐을 때, 알 수 없는 쾌감이 있었습니다. 가로지르거나 횡단한다는 느낌을 간직한 순간부터 글을 쓰게 됐습니다. 어렸을 적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결말을 혼자서 떠올리며 책 판권면에 적어보던 취미가 책을 쓰고 만드는 일로 번진 것을 보니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진 활동이기도 합니다. 문학이라는 산업의 일원이 되면서부터는 ‘활동’이라는 개념이 복잡하게 뒤바뀌었기에, 이렇게 쓰는 역사의 첫 순서를 이야기해보게 되네요.

스무 살에 등단하며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시인’이라는 어떤 정체성을 바로 느끼기엔 역부족인 사건이었어요. 2014년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했을 때, 제가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었는데요. 학교를 다니며 첫 시집을 준비할 때였어요. 하루는 마감 시간에 임박해 시를 쓰고 있었는데 그 시에 너무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전력을 다했다는 느낌이 난생처음으로 들었어요. 작품을 다 쓰고 진이 다 빠져 침대에 누워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 그 경험을 통해 나를 작품에 이식하고 나눈다는 느낌을 온전히 겪으면서 스스로 자각해본 계기가 됐어요. 결국에 ‘제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흰 종이 앞에 앉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창작으로부터 희열과 외면과 고통과 불화를 자유롭게 느끼게 됐고, 그 자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출간한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를 꼽고 싶어요. 무언가 하나만 꼽아야 할 땐 언제나 가장 최근 작품을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갱신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싶기도 하고요.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 존재가 겪는 빛과 어둠, 상실과 회복의 자리를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대면의 반대말이 비대면이 아닌 외면인 것처럼, 의미의 격차가 발생할 때 그 사이로 틈입하는 어떤 진실들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래에는 산문집을 집필하고 있어요. 아무런 원고도 없을 때, 『기다림 도록』이라는 제목을 먼저 정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삶이 무수한 기다림과 지연으로 점철된다고 생각했기에 쓰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었는데, 어떤 기다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끝나지 않은 기다림에 대해서는 쓸 수 없다고, 어떤 기다림을 끝마치기 위해선 또 다른 기다림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으며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의지는 또 하나의 고독”이라는 에밀 시오랑의 말을 빌려, 한 사람의 의지와 고독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산문집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서윤후의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지금보다 젊을 땐 영감이라는 것이 외부와 연결되는 접점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어요. 내가 향유하는 많은 예술 작품이나 다양한 경험이 저를 구성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려앉은 의미들을 지금은 검토하고 체화하고 있는 듯해요. 그래서 이제는 영감이 내부에서 작동하는 어떤 것이자, 외부와의 단절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상실을 겪고, 어떤 끝맺음을 통과하고, 많은 이별을 지나면서 쓰고 싶은 동력을 얻기도 합니다. 우스운 소리로, 작품 활동이 왕성하다면 제가 많은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라 여겨달라고 독자분들에게 말한 적 있었는데,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헤어짐은 막을 수 없으니,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딱 한 번만 돌아볼 수 있게. 그런 각오로 지내면서 저와 연결되고 유실되는 모든 것들이 영감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본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꼭 소개하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요. 2023년에 개봉한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통해 글을 썼던 저의 유년을 통째로 들켜버렸어요. 너무 기쁜 수치심이었습니다. 내가 비밀을 갖기 시작한 것도 글을 쓰게 된 순간부터였고, 그것은 저를 구하기도, 아주 곤란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느꼈습니다. 표현하려는 많은 창작자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두고 보고 싶습니다. 어떤 비밀은 끝끝내 열리지 않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탄로나지 않고, 들키지 않으면서 표현하는 일이 누군가를 통째로 뒤흔들고, 또 비밀을 나누는 존재가 돼준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참 고마운 영화입니다.

많은 지면과의 약속으로 쓰게 된 글들만 있지, 홀로 나서는 마음으로 글을 쓴 지는 참 오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용기를 내 메일링 서비스를 운영했고, 그 누구와도 약속되지 않은 온전히 제 안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적어 메일로 옮기는 작업을 했어요. 계약과 약속과 마감의 굴레 속 정작 저는 제 글에서 주체적이었나 의심하게 된 한 해였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움직이고, 일으키고, 끝맺는 작업들을 계속 해 보고 싶습니다. 볼만한, 읽을 만한 저의 채널을 웹에 구축하는 것도 목표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며 오랫동안 블로그에 일기를 올리고 있는데 나의 장소로서 존재하는 무형의 공간을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로 채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오래 머물고 싶은, 말 걸어보고 싶은, 창을 닫고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정리 나혜린 서울문화재단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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