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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예술가의 진심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
서선영의 오페라

지난 2월 말, 할리우드 유명 배우의 발언이 오페라 업계의 화두였다. 좋은 콘텐츠는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취지로 인터뷰하던 중 “오페라나 발레처럼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을 유지해달라는 식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는 예시를 든 것이다. 이에 세계 곳곳의 오페라극장이 소셜미디어 계정에 ‘우리가 관심이 있다We Care’며 게시물을 올리는 현상이 한동안 유지됐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페라 관련 게시물은 노이즈 마케팅 같은 효과를 얻으며, 오페라 제작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예술적 노력이 필요한지 증명했다.

4월 서울시오페라단 <나부코> 무대에 오르는 서선영의 삶도 오페라로 점철돼 있다.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 “오페라라는 숭고한 경험이 가진 가치”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흔히 소프라노의 삶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노랫말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처럼, 아리아 한 소절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예술가의 진심이 여기에 담겨 있다.

교단 위에서, 성악가의 시작을 다시 묻다

서선영의 봄은 캠퍼스의 설렘과 시작됐다. 2021년부터 모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학생들을 위한 터전을 가꾸고 있기 때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1993년 전문 예술가를 육성하겠다는 비전으로 설립된 이래, 음악 부문에서 국내 교육만으로도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예술가들을 길러내며 그 성과를 입증하고 있다. 서선영은 이곳에 수석으로 입학해 예술사 과정(성악)과 예술전문사 과정(가곡·오라토리오)을 밟았다.

새내기 학생들을 맞이하며 여러 소회가 들것 같아요. ‘나의 입학 시절’도 떠오를 것 같고요.

갓 구워낸 빵처럼 따끈따끈한, 신입생의 에너지가 풍기는 계절이네요. 수십 년 전 학생으로 이 교문을 들어서던 제게도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가 있었죠. 하지만 그 시절 우리는 두려움조차 설렘으로 바꿀 만큼 순수한 열정이 있었어요. 그 마음을 지금의 제자들도 오롯이 느낄 수 있으면 하네요. 개인적으론 학과장이라는 중책으로 행정 업무도 많이 배우고 있는 요즘입니다.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 한 뼘 성장하고 있음을 느껴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음악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렇기에 기술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격이고요. 화려한 기교로 귀를 현혹하기보다는 투명한 인품으로 마음을 흔드는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수업마다 강조합니다.

그 ‘진실함’이 구체적으로 음악에는 어떻게 적용되나요.

창작자의 의도를 겸허히 따르는 것이죠. 고심 끝에 작곡가가 적어 내려간 것을 자의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진실한 노래’란, 작품에서 받은 감동의 크기만큼만 표현하는 것이에요.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거나 포장하지 않는 것, 그 적정선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만 고귀한 예술의 경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삶에 ‘진실하게 감동’해야 해요. 내면이 채워져야 하죠. 학생들에게 악보 밖의 세상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2022년 창단 60주년을 맞아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한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국립오페라단

음악가 경력에 콩쿠르는 여전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은 본인에게 어떤 계기가 됐나요.

콩쿠르 우승 상금은 젊은 성악가의 유학 비용이나 초기 활동 자금으로 큰 힘이 되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매년 수많은 콩쿠르 우승자가 배출되기에 1~2년 안에 오페라극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금방 잊히기 마련입니다.

성악가 활동을 잘 이어가기 위해, 오늘날 어떤 음악교육이나 조언이 필요할까요.

실질적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를 말하고 싶네요. 첫째, ‘성악가가 아닌 배우’가 될 것. 과거엔 가만히 서서 노래만 잘해도 박수받았지만, 이제 오페라극장은 영화배우 같은 연기를 원해요. 연기 수업과 신체 사용법 등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론 ‘언어’입니다. 노래할 때 정확히 발음하는 수준을 넘어 일상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연출가의 지시를 즉각 이해하고 자신의 의견도 제안할 수 있죠. 비즈니스 수준의 언어 능력이 곧 생존력이에요. 그리고 자신을 마케팅하는 ‘1인 기업’ 같은 자세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직접 관리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론, 정신력과 비즈니스 문해력이에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하고, 계약서의 조항을 명확히 이해하며, 자신의 목소리에 무리한 제안은 거절할 줄 아는 자기 경영 능력이 필요합니다.

서울시오페라단 <라 보엠> 2024년 무대 ⓒ세종문화회관

한 사람의 오페라 가수가 탄생하기 위한 시간

서이쯤에서 상기해보는 의외의 사실 하나. 모든 성악가가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명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소리를 뚫고, 수천 석 끝까지 전달될 음량을 갖추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몇 년을 오페라극장에서, 시쳇말로 ‘구른다’고 표현하는 시간도 견뎌야 한다. 이를 경험한 성악가 사이에 “오페라극장 소속 솔리스트가 되는 건, 그 극장의 먼지를 다 마시고도 노래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 재능에 더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스위스 바젤 극장에서의 시간을 견딘 서선영에게도, 오페라는 그렇게 오랜 설렘이자 운명이다.

오페라는 노래뿐 아니라 무대·연출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입니다. 나를 처음 사로잡은 전막 오페라의 경험은 언제였나요.

진정으로 저를 사로잡은 무대 경험은 생각보다 조금 늦게 찾아왔어요. 2013년쯤 슈투트가르트 오페라에서 푸치니 <나비부인>을 봤을 때였죠. <나비부인> 속 주인공 초초상은 일본인 여성인데, 그날 무대에는 금발의 서양 소프라노가 올랐어요. 어느 순간 완전히 무대에 몰입했고, 예술가의 진심이 온전히 전달된다면 외형적 장치는 본질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직 음악과 그 속에 담긴 영혼만으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전율을 일으켰죠. 이후 제 예술 철학의 근간이 되기도 했어요. 외면의 형식을 넘어선 내면의 진실, 그것이 제가 지향하는 오페라의 가치입니다.

독일 뒤셀도르프 유학 이후 2011/12 시즌부터 2015년까지 스위스 바젤 극장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시간은 본인에게 무엇을 남겼나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생활인으로서의 태도를 동시에 정립한 시기였어요. 유럽 예술가라면 막연한 환상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문화는 꽤 담백하거든요. 성악가는 자기 일을 수행하는 전문직으로 존중받아요. 이웃들은 제 공연을 보러 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지만, 평소엔 그저 한 인격체이자 친근한 이웃으로 대해줬어요. 그 ‘일상적 존중’ 덕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예술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오페라극장 소속의 솔리스트 생활은 얼핏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무척 치열할 겁니다.

무대라는 공간은 처절하고 정직한 노동의 현장이죠. 어느 날은 공주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청소부가 돼 바닥을 굴러야 하니까요. 같은 장면을 수없이 반복하면 다리에 온통 멍이 가실 날이 없었죠. 그러나 그 시절 인정과 배움의 자세를 깊이 새겼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고뇌하고 준비했을 동료 예술가에 대한 ‘인정’에서 비롯한 신뢰가 쌓였죠.

경험한 오페라 무대 중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푸치니 <수녀 안젤리카>입니다. 역할 자체가 제 음색과 부합하기도 했지만, 배역이 겪는 극적인 감정 변화가 제 예술적 호기심을 강렬히 자극했어요. 그녀가 겪는 고통과 구원의 서사는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지니고 있어요. 언젠가 한국 관객에게도 꼭 온전히 선보이고 싶네요. 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꺼내 보여드릴 수 있는, 분신 같은 작품이거든요.

서정에서 드라마로, 나이테를 더하다

오페라 작품에서 주역은 음역대에 따라 소프라노·메조소프라노·테너·베이스 등으로 나뉘지만, 배역의 질감이나 음색으로 인해 좀 더 세분된다. 소프라노 안에서도 밝고 부드러운 음색의 ‘리릭’, 강렬한 드라마에 어울리는 어둡고 압도적인 성량을 갖춘 ‘드라마틱’ 등이 있다. 그리고 ‘스핀토’는 ‘밀어붙이다’라는 이탈리아어 어원처럼, 리릭의 서정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결정적 힘을 필요로 한다.

베르디는 여성 주인공으로 드라마틱 소프라노를 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 연기할 <나부코> 속 아비가일레도 그렇지요.

저는 리릭에 가까운 서정적인 소리로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세월이 흐르고 무대 경험이 쌓이며 악기(몸)가 단단해졌고,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무게감이 더해졌습니다. 성악가에게 목소리 변화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요. 젊은 시절의 맑은소리도 아름답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후하고 깊은 울림이 더해질 때 베르디나 푸치니가 요구하는 처절하고 강인한 여성상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게 되죠. ‘아비가일레’ 역시 드라마틱한 역량을 요구하고요. 제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서정성과 그간 쌓인 묵직한 힘으로 입체적이고 밀도 높은 노래를 전해드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비가일레 역으로 처음 악역에 도전합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욕망으로 들끓으면서도, 마지막엔 스스로 독약을 마시며 자신이 거부하던 신 앞에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인데요.

아비가일레에 대해선 가여움이 먼저 느껴져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하죠. 흥미로운 점은, 상황이 자기 뜻대로 흘러갈 때 음악의 템포나 리듬, 선율이 무척 유쾌하고 쾌활하게 바뀐다는 사실이에요. 그런 점에서 아비가일레가 오히려 ‘순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요. 진정 영악했다면, 그 야망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표출하지 않았겠죠. 그 어수룩함이 그녀를 단순한 악인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 존재로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되었습니다. 처음 도전하는 악역이지만, 감정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음악적 표현 덕분에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오텔로>, <아이다> 등 무대에 올랐고, 이번이 일곱 번째 베르디 작품입니다. 그간 국공립 단체에서 선보인 베르디 작품을 경험하며 느낀 소회가 있다면요.

이탈리아의 민족성과 우리의 정서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새삼 실감합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공통점과 기질적 유사성이 만들어낼 것 아닐까요. 그 속에 흐르는 특유의 속도감과 청량한 음악적 쾌감이 우리 정서와 깊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술가로서 아쉬운 점은 작품이 편중되는 현상입니다. 뛰어난 작품이 많은데, 대중성이라는 문턱에 걸려 소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나부코>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제게 더욱 뜻깊네요.

마지막으로, 오페라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은.

오페라를 박제된 이야기가 아닌, 무대 위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생생한 에너지를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곳으로 느껴보기를 권합니다. 풍성한 음악이 여러분의 감각을 깨우고, 눈앞의 연기가 마음을 흔드는 순간, 오페라가 더 이상 낯선 장르가 아닐 테니까요.

허서현 월간객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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