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 돌풍,
K-콘텐츠를 다시 생각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돌풍이 막 시작됐을 무렵, K-팝 대형 기획사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작품이 화제에 올랐다. K-팝이 전 세계에서 인기인 시대에 한국에서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우리는 절대 못 만들었을 겁니다.”
다른 이들도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에선 나오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케데헌은 미국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하고, 글로벌 OTT 최강자 넷플릭스가 유통했다. 제작비는 대략 1억 달러(한화 약 1,399억 원)로 알려져 있다.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100억 원임을 고려하면 엄두조차 내기 힘든 규모다. 넷플릭스처럼 대규모 제작비를 투자하고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는 토종 OTT가 없다는 점도 뼈아프다. 무엇보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제작 토양과 시스템을 고려할 때 ‘악귀를 소탕하는 K-팝 아이돌’이라는 설정을 떠올릴 창작자도,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제작사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케데헌은 ‘K-콘텐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지식재산권IP은 글로벌 제작사와 플랫폼이 쥐고 있지만 내용 면에선 K-콘텐츠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샤머니즘 세계관과 K-팝 시장, 아이돌과 팬덤의 아키타입을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탄탄하게 결합한 작품은 보지 못했다.
루미·미라·조이로 구성된 걸그룹 ‘헌트릭스’는 무당에서, 보이그룹 ‘사자보이즈’는 저승사자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루미의 사인검과 미라의 곡도, 조이의 신칼 같은 무기 역시 한국의 전통 무속에서 기원했다. 루미와 진우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더피’와 ‘서씨’는 민화 호작도(작호도) 속 호랑이와 까치에서 되살려냈다. 전통적 세계관에 K-팝과 현재 문화를 완벽하게 접목했다. 서울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이 한약방에 가서 한약을 짓고, 목욕탕에 가서 탕에 몸을 담그고, 김밥과 컵라면을 먹는 모습은 한국인의 눈에도 크게 거슬리는 것 없이 사실적으로 표현됐다.
어설픈 흉내 내기나 문화적 맥락의 왜곡 없이 K-컬처를 오롯이 잘 그려낸 데는 작품을 구상하고 직접 연출한 매기 강 감독의 힘이 컸다. 소니 픽처스의 제프리 고드식 부사장은 최근 국내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해 케데헌의 성공 원인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아 헤맨 결과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다섯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매기 강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루미가 인간과 악귀의 혼혈로 태어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설정엔 그의 이민자로서의 경험이 투영됐다. 한국의 문화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싶어 한국의 신화와 귀신학 등을 연구했다. 한국에선 익숙해서 지나쳤던 무당과 저승사자, 호작도 등을 서구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해 매력적으로 되살려냈다. 그런 면에서 감독의 말처럼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경험한 크리에이터의 활용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케데헌 열풍은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내놓은 굿즈를 구하기 위해 ‘오픈런’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케데헌 속 지역을 찾아가는 관광 투어 상품은 물론, 컵라면과 스낵 등 각종 협업 제품이 앞다퉈 출시됐다. 호랑이 더피의 인기에 힘입어 다양한 캐릭터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최근 리움미술관은 상설 기획전 《까치호랑이 호작》도 시작했다.
물론 케데헌 작품을 계기로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해외 돌풍에 편승한 소비 현상에 가깝지,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외국인이 한복과 한옥, 국악과 판소리, 전통무용 등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내심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달리 정작 우리는 일상에서 전통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사한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 결과 우리 국민의 전통예술 관람률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
우리가 전통을 일상에서 누리지 못하고, 문화적 자부심을 키우지 못한다면 ‘K-콘텐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해외의 인정이나 평가가 K-콘텐츠의 기준을 대신하게 둔다면 ‘K-’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흔들리고 본질이 왜곡될지도 모른다. 케데헌의 성공은 K-팝과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세계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남은 과제는 우리가 그 문화를 일상에서 살아 숨 쉬게 하고, 그 가치를 세계와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문화 분야의 대대적인 정책 전환이 시급하다. 온갖 분야에서 ‘K-’가 난무하는 시대에 진짜 ‘K’의 가치와 정체성, 철학을 정의하는 브랜드 아키텍처를 마련할 시점이 됐다. 전통의 원형을 유지하고 가치를 보존할 수 있는 장기적 지원책과 함께 이를 현대적으로 활용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현재 부처와 관계 기관의 거버넌스 개편,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케데헌이 이례적인 반짝 흥행 사례가 아니라 지속적인 K-컬처 확산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지금부터 우리가 가는 길에 달렸다.
글 김나래 국민일보 문화체육부장 | 일러스트 slowreci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