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화예술계,
안녕한가요?
‘베를린이 문화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된 시위 현장의 모습 ⓒBerlinIstKultur
2024년 말, 드레스덴 도심의 카롤라 다리가 한밤중 붕괴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독일 경제와 인프라의 현주소’라는 상징성을 얻었다. 시스템은 너무 낡았고, 이를 철저히 점검하고 유지 보수하는 데 현 독일의 자원과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해결책을 내놓고 실천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곪아가던 문제는 카롤라 다리처럼 순식간에 내려앉는다.
독일 문화예술계에도 우려할 만한 전조 증상이 감지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된 베를린에서 그 증상이 두드러진다. 2025년 예산안에 따르면 도시의 미술·음악·영화·문학·무용 등 예술단체들은 지난해 대비 13% 적은 예산으로 운영돼야 한다. 삭감액은 1억 3천만 유로, 한화 약 2천억 원이다.
예산 초안은 많은 예술단체와 예술인의 반발을 샀다. 몇몇 극장은 예정된 프로덕션을 취소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장 1년 이내 파산 위기에 처할 수 있고, 어린이·청소년극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게 자명했다. 한 달에 1번 있던 미술관·박물관 무료입장 혜택이 폐지되고, 연극·오페라 티켓 가격은 높아져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베를린이 문화다’라는 슬로건으로 청원과 시위가 잇따랐다. 실험극의 산실인 샤우뷔네Schaubühne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싱켈 파빌리온Schinkel Pavillon 등 문화예술계가 한목소리를 냈다.
큰 반발에 부딪혀, 전체 목표 절감액 1억 3천만 유로 내에서 삭감 대상이 재조정됐다. 어린이·청소년극 극장에 할당된 대규모 삭감액은 전면 파기됐지만, 이를 상쇄하기 위해 예술인 지원 제도 관련 예산이 훨씬 줄었다. 베를린의 세 오페라극장 중 하나인 코미셰 오퍼Komische Oper Berlin는 이미 확정된 리모델링 예산이 축소돼 공사를 미뤄야 할 처지에 놓였고,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Konzerthaus Berlin은 2월 예정인 ‘Projections’ 페스티벌을 취소했다. 정기 공연을 지킨 대신, 현대음악을 다루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축소한 결과다. 제바스티안 노르트만Sebastian Nordmann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 극장장은 “이번 예산 삭감으로 인해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위한 실험과 혁신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특히 고통스럽다”고 호소했다.
‘베를린이 문화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시작된 시위 현장의 모습 ⓒBerlinIstKultur
오래된 문제가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다
예산안 발표 전부터 이미 베를린의 몇몇 문화 공간은 고공 행진하는 월세, 인플레이션 등으로 폐관 위기를 겪고 있었다. 2024년 베를린의 테크노 문화Techno Culture in Berlin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예술적 가치를 마침내 인정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적인 베를린의 클럽 두 곳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폐해로 2025년 중 폐관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클럽도 높아지는 월세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데다,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대규모 전자 댄스음악 페스티벌과의 경쟁에서도 밀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쾰른·본·드레스덴·뮌헨 등 다른 도시도 2025년 문화예술 분야 예산 삭감 외에 해묵은 문제들로 시름하고 있다. 쾰른 오페라극장Oper Köln은 당초 2015년 개보수 공사를 완료할 계획이었지만, 공사 지연으로 인해 현재 2030년 재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결과 비용은 당초 2억 5천만 유로에서 14억 5천만 유로(한화 약 2조 원)까지 불어났다. 베토벤 탄생지인 본도 비슷한 상황이다. 2016년 개보수 공사에 착수한 베토벤할레Beethovenhalle는 작곡가 탄생 250주년인 2020년 재개관할 예정이었으나 현재 목표 개관일은 2025년 초로 잡혀 있다. 드레스덴의 한 박물관은 당장 지붕에서 비가 새는데도 보수 공사를 추진하기 어려운 상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예술 국가’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저렴한 생활비가 예술가들을 베를린으로 끌어들였고, 전쟁의 잔해였던 벙커는 예술이 탄생하는 무대와 캔버스가 됐다. 덕분에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한Poor but Sexy’ 도시로 거듭났다. 오늘날 베를린을 찾는 여행객의 절반 이상은 그 유산, 베를린의 예술을 만나기 위해 여정에 오른다.
과거 베를린의 매력이던 ‘저렴한 물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생존에 허덕이는 예술가들을 보호할 장치와 공간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 살펴야 할 문제들이 수두룩해 독일 문화예술계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샤우뷔네 극장은 건물 전면에 ‘꽤 어두워졌네Es ist etwas dunkel geworden’라는 문구의 플래카드를 걸었다. 이는 단지 상영 작품의 대사가 아니다. 독일 문화예술 생태계의 붕괴를 우려하는 절실한 신호이기도 하다.
글 박찬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