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사랑하는 일
책을 덮고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조금이라도 변모한다. 나의 중심이 미세하게 어긋난다. 문학을 사랑하는 일은 나의 어긋남과 변모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의 나 아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대학 문창과에서 몇 년째 세계문학을 강독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은 종강 날이었고, 캠퍼스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길게는 이백여 년 전의 세계문학 작품을 읽고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는 수업이다. 학생 가운데 하나가 노란 귤을 선물로 주었고, 수업이 끝난 후 빈 강의실에서 귤을 까먹었다. 창밖에서 내리는 함박눈과 귤의 새콤한 맛이 너무 잘 어울렸다.
머나먼 시공간을 날아와 안산에 위치한 한 강의실에 도착한 텍스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이 가끔 신비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열리지 않았을 타임캡슐을 전달받는 느낌이고, 문학은 그것이 쓰일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어떤 낯선 미래에 도착해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현재와의 대화를 촉발한다. 긴 시공간을 여행하던 책은 잠시 눈이 내리는 강의실 창틀에 앉았다가 떠난다. 겨울 철새처럼, 서서히 사그라지는 지저귐을 남기고.
문학은 내가 살아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의 곁에 있었다. 나에게도 나만의 자질구레한 인생사가 존재하지만, 내가 내 삶의 고유한 궤적을 따라가는 과정은 또한 문학과 동행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삶에 시달리다가도 버릇처럼 책을 펼치고 타인의 삶과 만났다. 그때마다 나의 삶을 잠깐 동안 잊어버렸다. 나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일상에서도 문학으로 인해 소박하게 감동할 기회를 얻었고, 허덕이거나 피로한 와중에도, 혹은 상처받거나 개인적인 일들로 괴롭고 슬픈 와중에도 문학 속에서 전율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나의 유한한 삶에 포함되었거나 감금되어 있었지만, 문학은 나를 나의 너머로 데려가거나 내 삶 안쪽에 타인의 삶과 목소리를 도입했다. 나는 문학으로 인해 문득 나로부터 멀어졌고, 책이라는 타자의 시간 속에서 헤매며 어떤 낯선 문장이나 이야기를 보물처럼 간직한 채 나의 삶으로 되돌아왔다. 내 삶이 내가 나아가야만 하는 대로라면, 문학은 이 정방향의 길 위에 내 한정적인 시공간 바깥으로 향하는 무수한 샛길을 포개놓는다. 문학은 내가 체험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너머의 시간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길러준다. 나를 망각할 능력을, 나의 망각 속에서 가능해지는 낯선 시간에 응답하고 그 낯선 시간 속에서 방황할 능력을 길러준다. 굳이 왜 나를 망각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나는 이백 년 전의 파리에, 백 년 전의 프라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렀다. 그리고 오늘의 안산에서, 문학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영원히 나와 무관했을 어떤 흐릿한 유령의 고통과 경이, 아름다움과 추락,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문학은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구원과 해방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단지 고통받는 인간이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인간이, 부조리에 억눌린 인간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 존재의 실감을 드러낸다. 그들의 존재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변한다.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내 안에 잠재하는 고통에서 탈출할 역량, 구원을 희구할 역량, 해방을 타진하는 역량을 깨닫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망각 속에서 타자 속으로 들어서고 내게로 귀환하는 반복된 원환을 그린다. 이곳에는 나의 삶만이 가득하고, 문학 속에는 타인의 삶만이 가득하다. 책을 덮고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조금이라도 변모한다. 나의 중심이 미세하게 어긋난다. 문학을 사랑하는 일은 나의 어긋남과 변모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의 나 아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가방에 있던 민병훈 작가의 『금속성』을 펼쳤다. 페이지 위로 눈송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깨를 웅크린 채 책을 쥐고 있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눈에 점령된 도시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도시가 계속 생겨났다.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민병훈, 『금속성』, 문학실험실, 2024, 118쪽) 그곳이 내가 모르는 곳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글 양선형 소설가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