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 인스타그램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SEOUL+

4월호

예술적 도시 읽기 영화관의 기적

극장 관객 1,5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 영화계에 단비와 같은 존재다. ‘코로나19는 끝났지만, 극장의 팬데믹은 계속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영화관의 관객 수와 매출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차에 나온 흥행 성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보면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영화관이 관객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관객 가뭄’이 대형 흥행작 몇 개 나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디어의 성공은 습관에 달려 있다. 30년 전에는 지하철에 타면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쳤고, 20년 전에는 컴퓨터를 켜면 곧바로 네이버·다음 같은 포털부터 들어갔고, 10년 전부터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찾는 게 습관이 됐다. 지금은 각종 쇼트비디오 플랫폼에 중독돼 있다. 돈은 그렇게 습관을 형성하는 미디어에 몰린다.

영화관을 먹여 살린 것은 주말에 친구나 연인과 외출해 식사 전후에 두 시간 정도를 보내는 사람들의 습관이었다. 그해 최고의 흥행작이 아니어도 습관처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산업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는 5센트짜리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니켈로디언 시절부터 이어져온 영화 산업의 경제학이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시작으로 스트리밍 서비스가 힘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습관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값비싼 영화관을 찾기보다는 배달 음식을 먹으며 집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팬데믹이 터지며 몇 년 동안 영화관에 가지 않는 동안 그런 형태가 뚜렷한 습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즉, 영화관 관객의 가뭄은 좋은 작품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단한 흥행작이 아니면 굳이 극장에 가려고 하지 않는 관객의 관성 때문에 발생했다.

사람들의 행동 변화가 바꾼 건 영화를 보는 장소만이 아니다. 영화의 전개 방식도 바뀌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가 제작한 영화에 출연한 맷 데이먼은 넷플릭스 임원에게서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캐릭터가 대사로 영화의 줄거리를 서너 번 정도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이유가 뭘까?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영화에 집중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연신 들여다보기 때문에 내용 전개를 놓치는 일이 흔하니,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런 사람들도 줄거리를 쉽게 이해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영화관의 위기나 단순해지는 영화 줄거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덧 한 장소에서 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소중한 체험을 잃고 있다. 수백 명이 어두운 극장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고!) 2시간 동안 조용히 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경험은 태곳적에 불가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이야기꾼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것처럼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동시대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의 책 『상상의 공동체』에서 유럽에서 민족국가가 형성된 배경에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설명한다. 과거 엘리트들은 라틴어라는 죽은 언어를 사용하며 지식을 독점했는데, 인쇄업자들이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지방어로 책을 찍어내면서 각 지역에서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저 너머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런 사람들이 근대 민족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 후 미디어는 책에서 신문으로, 라디오와 영화, TV로 발전하면서 현대 국가의 구성원을 ‘이야기를 공유하는 공동체’로 묶어줬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진정한 영화적 경험이란 낯선 이들이 어두운 공간에 모여 감정을 공유하고, 그 여운을 품은 채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에 있다”고 했다. 극장을 나오는 순간에는 모르지만, 그렇게 낯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공유된 경험이 훗날 국가에 중대한 의제가 생겼을 때 국론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영화만이 아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주요 지상파 뉴스를 함께 시청했고, 소위 황금시간대에 함께 앉아 드라마를 비롯한 인기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여론 형성에 중요한 뉴스의 경우, 모두가 같은 뉴스를 접하면?그 뉴스에 대한 의견과 무관하게?공유된 사실 관계shared reality가 만들어지고, 공통된 의제가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파편화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소셜미디어에서 각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알고리즘에 의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 결과 필터 버블에 갇히고, 자기와 같은 주장만 접하는 메아리 방 속에서 살아가게 됐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정치적 분극화polarization의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과거의 미디어가 단일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줬다면, 지금의 개인 맞춤형 미디어는 공유하는 사실 관계를 찾기 힘든 수천, 수만 개의 작은 상상의 부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이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우리 역사에 기반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시대에 함께 보며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은 요즘 같은 시기에 너무도 소중한 일이다. 같은 극장에 온 사람들이 세대도, 정치 성향도 다르지만, 같은 대사에 웃고 울 수 있다는 것은 훗날 우리가 중요한 의제를 앞두고 분열했을 때 최소한의 대화가 가능한 발판을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를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줄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박상현 오터레터 발행인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