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와 예술 몸의 또 다른 이름, 돌봄
안민정(b.1981), <자화상_라하프Self-Portrait_Rachaph>, 2024, 디지털 프린트digital print, 111.8×254cm
건축 도면을 연상시키는 안민정b.1981의 <자화상_라하프Self-Portrait_Rachaph>2024는 신체를 선과 기호, 수치가 교차하는 도면으로 펼쳐 보여준다. 투명한 필름 위에 그려진 컴퓨터 그래픽의 선은 해부학 도판과 정밀한 설계도를 떠올리게 한다. 신체의 표면은 세밀하게 구획되고, 각 부위에는 형태와 위치를 가리키는 선과 육안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담은 기호가 기입된다. 투명한 바탕은 선들이 이루는 구획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아래에 놓인 형상과 여러 층위가 겹쳐 보이게 한다.
자화상에 나타난 몸은 한 사람의 외형을 재현하는 ‘초상’의 범위를 넘어 개인의 생애가 남긴 흔적을 담는 도면이 된다. 도면의 중심에는 두 아이를 낳아 기른 작가의 신체가 놓여 있다. 피부의 흉터와 치과 치료, 임플란트의 위치, 립스틱 색상, 예방접종 자국, 임신과 출산에 따른 변화가 선과 기호로 나타난다. 치료의 흔적과 일상의 선택, 임신과 출산의 경험은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같은 화면에 나란히 기록된다. 임신기와 출산 이후, 수유기의 모습이 하나의 면 위에 포개지고, 배 속에 거꾸로 누운 아이의 형상과 수유를 둘러싼 익살스러운 문구가 양육의 구체적인 시간을 불러온다.
가족의 일상은 신체에 새겨진 경험을 생활과 연결해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오늘 반찬 뭐야?”, “또 엄마들이랑 커피숍?”이라는 문장에는 가족 사이의 친밀함과 긴장이 함께 배어 있다. 출산 이후 남편이 작가의 ‘오른팔’이 됐다는 표현은 양육의 책임을 나누는 관계를 보여준다. 돌봄은 개인의 경험인 동시에 일상의 노동과 책임을 나누는 과정이다.
도면에 나타난 태반은 신체에 관한 기록을 상호 의존성의 문제로 이끄는 핵심 이미지다. 태반은 임신 중 모체와 태아 사이 산소와 영양분을 교환하고 태아의 발달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작품에는 태아를 품은 몸과 함께 태반이 그려져 있다. 가족을 돌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다른 존재에게 보호와 영양분을 받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작가의 설명은 태반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태반의 형상은 아이를 품고 기르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생명을 지탱해온 존재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도 한때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으며, 지금도 주변의 도움과 환경에 기대어 살아간다. 태반의 생리적 기능에서 출발한 해석은 인간의 삶이 처음부터 다른 존재의 기여에 의존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토라
‘라하프’라는 제목은 태반의 형상을 성서의 한 장면과 연결한다. 토라의 신명기 32장 11절에는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날개를 펼쳐 이들을 나르는 모습이 등장한다. 해당 구절의 히브리어 동사 ‘라하프rachaph’는 날개를 퍼덕이거나 위에서 맴도는 움직임을 가리키며, 문맥상 아직 홀로 날 수 없는 새끼를 보호하고 이끄는 어미의 행위와 연결된다. 작품에 독수리나 날개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라하프’라는 제목은 태반을 포함한 신체 도면을 성서의 날개와 연결하는 해석의 실마리가 된다. 날개가 몸 바깥에서 새끼를 받쳐준다면, 태반은 몸 안에서 모체와 태아 사이의 물질 교환을 매개한다. 두 형상은 생명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작품은 두 아이를 낳아 기른 사람의 초상이면서, 또한 누군가의 보호와 양육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초상이기도 하다.
조안 트론토Joan C. Tronto는 돌봄을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며 복구하기 위한 모든 일”로 정의한다. 여기서 세계란 신체와 생활공간, 사람 사이의 유대,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얽혀 있는 삶의 터전을 뜻한다. 돌봄은 누군가를 직접 보살피는 행위뿐 아니라, 보살핌이 지속되도록 뒷받침하는 여건까지 포괄한다. 필름 위에 기입된 신체의 흔적은 임신과 출산·양육을 거친 한 사람의 생애를 보여준다. 그 생애에는 가족 구성원의 노동과 주변의 도움, 일상을 뒷받침하는 자원과 제도가 얽혀 있다. 작품은 이런 조건을 도면 위에 직접 그려 넣는 대신, 신체에 새겨진 경험을 세밀하게 기록함으로써 한 사람의 생애를 가능하게 한 관계와 환경을 생각하게 한다.
‘라하프’의 날개와 태반, 투명한 도면은 생명을 지탱하는 관계의 서로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누군가에게 받은 보살핌은 일상의 습관과 기억에 스며들고, 돌보는 행위는 세대와 시간을 가로질러 이어진다. 타인의 삶을 지탱하는 몸도 누군가의 손길과 도움에 기대어 살아간다. 우리 몸은 ‘돌봄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글 최정상 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