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읽는 경제학의 눈 다이애나, ‘마중의 경제학’을 다시 묻다
작가 앤드루 모턴Andrew Morton은 저서 『다이애나: 그녀의 진실Diana: Her True Story』1992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신데렐라였던 한 여인의 처절한 내면을 세상에 드러냈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지켜본 세인트폴 성당 결혼식은 20세기 최고의 동화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사랑’이라는 결핍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간 다이애나의 비명이 가득했다. 그녀의 삶은 화려한 왕관 속에 감춰진 지독한 소외와 무관심이 한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대중의 사랑이 어떻게 한 인간을 ‘공공재’로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제학적 비극의 전형이다.
무관심은 현대 부부들 사이에 헌신짝처럼 널려 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친구와 소통하는지, 무엇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지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 한 남편이 상담 전문가와 나누는 대화는 우리 시대의 메마른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집은 그냥 하숙집 같아요. 아내가 좋아하는 예술가 이름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요?”라는 항변은, 관계 유지에 투입해야 할 최소한의 사람에 대한 투자를 포기했다는 선언과 같다. 부부 사이의 상처는 사랑 없이 상대를 대할 때마다 생겨나는 흉터와 같다. 무관심이 쌓이면 소통의 통로는 막히고 화해의 기회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한때는 상대가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라며 먼저 마중을 나가던 뜨거운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철 지난 옷처럼 퇴색하고 만다. 결혼은 승리가 아니라 지속에 관한 것이다. 서로를 향해 달려가던 ‘마중의 경제학’이 멈추는 순간, 가계라는 경제 단위는 정서적 파산 상태에 직면한다. 다이애나의 삶 역시 이러한 무관심과 소외의 극단에서 시작됐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과 신데렐라의 환상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Alan Krueger는 세대 간 계층 이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고안했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높을수록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지고, 부모의 소득이 자식의 성공을 결정짓는 구조가 고착화된다는 이론이다. 무일푼에서 백만장자가 된 개츠비처럼, 유치원 보모인 다이애나가 왕세자빈이 된 사건은 전 세계 대중에게 이 사다리를 단숨에 뛰어넘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왕실이라는 최상위 계층으로의 진입은 행복의 담보가 아니었다. 찰스 왕세자는 첫사랑 카밀라를 잊지 못한 채 다이애나를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인형이자 전략적 자산으로만 취급했다. 다이애나는 훗날 “세 사람이 함께한 결혼이라 좀 붐볐다”고 냉소적으로 고백했다. 이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넘어선 기만적 계약이었다. 대중이 본 것은 에메랄드 안경을 쓴 화려한 왕세자빈이었지만, 안경 너머의 진실은 거식증과 우울증으로 얼룩진 한 여인의 고독한 섬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용이 머무는 자리가 진정으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인가 하는 문제다.
경제학적으로 다이애나는 전 세계가 공동으로 소비하는 공공재와 같았다. 누구나 그녀의 패션을 즐기고, 그녀의 미소를 소비하며, 그녀의 사생활을 타블로이드지를 통해 관람했다. 공공재의 특징은 비배제성과 비경쟁성이다. 누구나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그녀라는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었지만, 이 공공재적 성격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부負의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y’를 가져왔다. 대중의 관심이라는 수요가 폭증할수록 파파라치의 추격은 집요해졌고, 출판업자들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녀가 대중에게 즐거움을 줄수록 그녀 개인의 리스크와 스트레스는 폭증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그녀라는 공공재를 소비하는 대중은 즐거웠지만, 그 대가는 오롯이 다이애나라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와 정신적 고통으로 돌아갔다. 결국 파리의 지하 터널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는, 과도한 수요가 공급자를 파괴해버린 최악의 시장 실패이자 사회적 손실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찾아, 다시 마중 나가는 마음을 위하여
앤드루 모턴이 기록한 진실 중 가장 애틋한 대목은 파키스탄 출신 의사 하스나트 칸Hasnat Khan과의 사랑이다. 다이애나는 왕세자빈이라는 화려한 옷을 벗어 던지고, 좁은 아파트에서 그의 옷을 다려주고 접시를 닦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을 꿈꿨다. 그녀는 그에게 ‘DDG(눈이 부실 정도의 멋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필사적으로 결혼하려 했다. 이는 사회적 지위라는 막대한 자산을 포기하고서라도 얻고 싶었던 정서적 효용의 극치였다. 사랑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이애나가 칸의 좁은 아파트에서 찾으려 한 것은 왕실의 금식기가 아니라,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소박한 대화였다. 비록 그녀의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했고 끝내 별이 돼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의 흔적은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윌리엄과 해리는 어머니의 불행을 반면교사 삼아 신분이 아닌 진심을 따르는 결혼을 선택했다. 선대의 불행이 경로 의존성을 깨고 자식 세대에서 축복으로 승화된 것이다.
앨런 크루거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조언했을 것이다. “무모한 집착이나 과시적 자산으로서의 사랑은 결국 파국을 부릅니다. 진정한 행복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평범하고도 정직한 교환에서 옵니다.” 다이애나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소중한 사람을 위해 먼저 마중 나갈 준비가 돼 있는가. 사랑은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나 화려한 왕실의 직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슬픈 영혼을 달래주고, 퇴근길 현관문 앞에서 “왔어?” 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그 작은 배려야말로 세상 그 어떤 경제적 가치보다 귀한, 인생의 진짜 수익률이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파탄을 보며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마음은 왕족이나 일반인이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밤하늘의 별이 된 다이애나의 미소가 오늘 우리에게 속삭인다. 사랑 앞에 더 용감해지고, 더 많이 마중 나가라고 말이다. 이제 우리는 무관심의 헌신짝을 치우고, 다시금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물거품이 되지 않는 사랑, 신기루가 아닌 실체의 행복을 붙잡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글 조원경 세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