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 ‘염소 선생님’은 잊은 건가요?
동시대적 고전 읽기
광장에 있는 동안만 안도할 수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한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계엄의 시간은 짧았으나 정치권의 민낯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집단 퇴장하던 순간은 정신이 아찔하여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국회의원이 투표를 거부하다니! 여느 정치평론가들처럼 손쉽게 조소하며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어떤 인물이 무언가를 선택하면 그 행동의 동기를 찾는 것이 연극 작업자의 일. 나는 묻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토록 무책임한 행동을 강행하면서까지 저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국회의원이니 보수주의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유 체계일 터, ‘보수주의’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유’, ‘반反공산주의’, ‘질서와 전통’ 등 보수주의를 설명하는 개념어로는 현재를 설명할 수 없을 듯했다. 게다가 이런 단어들로는 끝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무한히 반복하게 되곤 하지 않던가. 공통의 언어가 절실했으나 그것이 ‘문과의 언어’는 아닐 터였다. 대안적 설명을 찾다, 인지과학의 언어를 마주했다. 영국의 스타 과학자 한나 크리츨로우Hannah Critchlow에 따르면, 뇌 스캔 영상으로 사람의 정치 성향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뇌 자체가 다르게 생겼다는 것. 일반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예민한 편도체를 갖고 있으며, 그런 까닭으로 “위협의 인지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보호를 염두에 두고 행동”(『운명의 과학』2020)하게 된다는, 알쏭달쏭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끝내 나는 설명할 논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대의민주주의의 절차를 무시했을 리 없을뿐더러 계엄을 ‘위협’으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 역사에 무지할 리 없으며, 보수주의가 무엇이든 그것이 직무 유기의 근거일 수는 없을 터였다. 수백 년 동안 쉼 없이 개선돼온 정치철학, 보수주의가 그렇게 시시한 것일 리 없지 않은가. ‘한때는 마음을 뺏겨 삶의 중심에 두었던 어떤 신념이 있었으나 이제는 설렜던 기억조차 흐릿해져 그저 살고 살아남는 일이 전부인 삶의 행보’라는 편이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듯했다.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실로 이야기의 역사에서 어떤 인물이 지금의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한 존재나 계기를 망각한 채 그저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안위만을 살피기 급급한 경우는 흔하디흔하다. 나는 유독 이런 서사 전개에 크게 낙심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이었던 작품은-때마침 영화로도 개봉한-뮤지컬 <위키드Wicked>였다.
뮤지컬 <위키드>2003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고전 판타지, 라이먼 프랭크 바움Lyman Frank Baum의 <오즈의 마법사The Wonderful Wizard of Oz>1900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유쾌하게 뒤집은 그레고리 매과이어Gregory Maguire의 동명 소설1995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지난해 11월 말 영화로 개봉한 1막의 줄거리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타고난 초록색 피부 때문에 외톨이로 살아온 엘파바가 탁월한 마법 재능으로 쉬즈대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하다가,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구명하기 위해 찾아간 에메랄드 시티에서 ‘오즈의 마법사’의 계략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 즉 남다른 피부색 때문에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살아오다 남달리 뛰어나다는 이유로 세상에 받아들여질 기회를 얻었으나, 또다시 남과 다른 몸을 살피는 마음 때문에 ‘사악한 마녀’로 낙인찍혀 추방되는 존재, 엘파바가 바로 <위키드>의 주인공이다.
가장 유명한 넘버이자 1막의 마지막 곡인 ‘중력을 넘어서Defying Gravity’에서 엘파바는 노래한다. “뭔가가 달라졌어. 내 안에 무언가, 이젠 의미 없어. 남들이 정한 규칙들. 난 깨어나버렸어. 돌아가긴 늦었어. 내 직감을 따를래. 눈을 꼭 감고 날아올라 중력을 벗어나 하늘 높이 날개를 펼 거야. 날 막을 순 없어.” 기실 엘파바는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스승을 만났고,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글린다와 친구가 되었으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이는 이성 피예로가 생겼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그녀를 각성시킨 것은 ‘염소 선생님’ 닥터 딜라몬드였다. 자신처럼 남과 다른 몸을 가진 ‘염소 선생님’은 엘파바의 첫 친구가 돼주고, 동물을 배제하고 제거하려는 거대한 음모에 대해 들려주며, 엘파바의 눈앞에서 난폭하게 체포된다. 1막의 마지막, 동물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흩어진 오즈인의 민심을 수습하겠다는 무능한 통치자, ‘오즈의 마법사’에게 저항하겠다고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염소 선생님’과의 만남이 남긴 돌이킬 수 없는 변화 때문이다.
2012년 호주 공연팀이 내한해 공연했을 때, 나는 인터미션 내내 가슴이 쿵쾅거려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서 빨리 배우들이 돌아와 각성한 엘파바가 어떤 모험을 펼쳐내는지 보여주길 바랐다.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나는 2막 내내 절망했다. 엘파바가 휠체어 사용자인 동생 네사로즈를 마법으로 걷게 하고, 피예로와 도주해 사랑을 나누며, 그를 두고 글린다와 반목하다 종국에는 화해하는 2막 내내 하품이 나왔다. 고작 이런 정도의 일을 하는 엘파바는 중력을 거슬러 비상하던 엘파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파바는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 그녀는 ‘염소 선생님’은 완전히 잊고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선택만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그녀를 그녀로 변화시킨 존재를, 그가 남긴 찬란한 사유를 망각한 듯 보였다.
기실 매과이어의 소설 속에서 에메랄드 시티에서 도주한 엘파바는 레지스탕스로서 ‘오즈의 마법사’에게 대항하다 죽음을 맞는다. 피예로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피예로가 자신의 안전을 염려해 그녀를 막으려 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너를 사랑해. (…) 하지만 네가 반대해봤자 나를 막을 힘은 없어.”
(『위키드 1』2008) 그녀는 그녀로서 살고, 그녀로서 사랑하다, 그녀로서 죽는 것이다. 뮤지컬이 원작 소설과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염소 선생님’을 기억하는 엘파바라면 얼마나 별나고 이상하고 매혹적인 사랑과 우정을 이어갈지 궁금할 뿐이다. 매과이어가 바움을, 뮤지컬이 소설을 고쳐 썼듯, 영화가 이 시대를 위해 <위키드>의 2막을 새로 써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른 결말을 그려본다. 관객의 이런 상상이야말로 현실을 새로 쓸 가상의 이야기틀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다른 이들의 상상을 궁금해한다.
<위키드>는 묻는다. 내가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글린다의 노래처럼, ‘인기popular’는 좋다. 더욱이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가족·친구·연인에게만큼은 사랑받고 싶어 끊임없이 주저하는 엘파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허나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자신보다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수주의에 대해 찾아 읽다 한 미국 보수주의 정치인의 소개 문구에 마음이 설렜다. “적당한 타협 대신 철저한 원칙을 제시하며, 기꺼이 정치적 파멸을 감수[하여] 보수주의의 혼을 흔들어 깨[운] ‘가장 영향력 있는 낙선자’”라니(박종선 역, 「옮긴이의 글」, 『보수주의자의 양심』2019). 나는 이야기에서도, 우리의 현실 정치에서도 이런 문장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가 믿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함께 믿고 싶을 것이다.
글 전영지 공연 칼럼니스트· 드라마터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