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짜 새해소망은
산책엔 플레이리스트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의 세계를 아시는지. 1964년 미국의 만화비평가 리처드 카일Richard Kyle이 명명한 장르인 그래픽 노블은,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 구조와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그림을 특징으로 한다. 나는 이 그래픽 노블이 음악가의 전기물에 탁월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음과 음 사이에서Between
Two Sounds: Arvo Part’s Journey to His Musical Language』2024를 읽으며 다시 한번 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작가
요나스 실드레Joonas Sildre가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art를 7여 년간 곁에서 지켜보며 기록한 책이다.
그래픽 노블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된 건 『글렌 굴드: 그래픽 평전』2016을 통해서였다. 글렌 굴드의 음반이나 연주 영상뿐 아니라 인터뷰집, 다큐멘터리 영상물까지 나름대로
섭렵하며 그의 음악세계를 만끽하던 나는 그의 그래픽 노블을 읽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이 형식은, 음악이라는 추상예술이 시각화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재미를 선사할 뿐 아니라 정적인 흐름으로 사유의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때로는 색감으로, 때로는 어떠한 방향성으로 음악이 피어나고 전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래픽 노블 안에서 음악은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도형이 되기도, 선이
되기도 한다.
『음과 음 사이에서』 또한 개념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문장들로 읽는 즐거움을 준다. 아르보 패르트의 어린 시절부터 음악가로서의 철학, 종교관, 강압적인 당대 사회 배경 속에 변화해가는 삶의
방향성까지 착실히 기록한다. 작곡가에게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영감이 곡이 되는 과정, 음악에 깃든 상징들, 그것이 듣는 이에게 전달되는 과정 등이 흥미롭게 기록돼 있다. 커다란 판형의 묵직한
양장본을 천천히 넘기다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면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세계를 온몸으로 들어낸 기분이 든다.
아르보 패르트는 현존하는 여러 음악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손꼽힌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 연주회장의 프로그램에도, 대중 영화나 광고에도 이름을 올린다. 1935년 에스토니아 태생의
패르트는 젊은 시절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음악 작품을 선보이다 점차 단순한 요소, 엄숙한 분위기의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나갔다. 패르트 스스로 이름 붙인
‘틴티나불리Tintinnabuli’ 작법은 종이 울리고 난 후에 남아 있는 공명, 즉 잔향을 활용해 미니멀 음악을 완성하는 표현 방식이다. 패르트의 종교적 성향, 영적인
감수성을 내포한다.
책은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크레도’, ‘실렌티움’, ‘타불라 라사’의 세 장, 그리고 에필로그 격의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음 속에 피아노를 연주하던 소년이 탈린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에스토니아 라디오 방송국에서 사운드 엔지니어 일을 하며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첫 장의 제목인 ‘크레도Credo’는 패르트가 1968년에 네메 예르비 지휘로 첫선을 보인 곡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주요한 변곡점을 이룬다. 바로크 시대 합창음악에서 영향받은
이 작품은,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거대한 규모로 쏟아지듯 아우성치다 종국에는 가장 단순하고도 영적인 하나의 지점에 가닿는 흐름을 보인다. 초연 현장의 생생한 묘사, 이후 밤의 눈 내리는 기차 위
풍경, 당대 소비에트 동맹 관리들로부터 압박을 받는 장면이 이어지며 작곡가의 고독한 번뇌를 상상하게 만든다.
책의 2장 ‘실렌티움Silentium’은 ‘고요한silence’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며, 3장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깨끗한 석판’,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라는 뜻이다. 패르트는 1977년 2악장 구성의 실내악곡 ‘타불라 라사’를 발표했고, ‘실렌티움’은 그 2악장의 소제목이다. 책의 후반부는
패르트가 음악가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영적인 상태, 즉 말씀 그 자체로의 소리, 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존재의 본질을 되뇌는 ‘침묵’의 노래에 관해 깊이 있게 다루는 데 집중한다. 앞선
‘크레도’처럼 ‘타불라 라사’는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세계를 논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실렌티움’의 마지막 부분, 각 성부가 차례로 노래를 마치고 더블베이스가 마지막 한 음을
피아니시모로 연주하고 나면 악보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마디가 몇 마디 이어진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어떠한 정신적인 상태를 들려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소리의 창조자가 아니라
매개자다. 돌 속에 존재하는
조각품을 조각가가 끄집어내듯
음악은 작곡가 없이도 우리 세상에
존재한다.
『음과 음 사이에서』, 135쪽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이중주곡으로, 앞의 멜로디를 거울처럼 뒤따르며 끝없이 반복되고 그러면서도 중심음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영화 <그래비티>, <어바웃타임> 등에 수록된 바 있다. 이 외에도 ‘형제들Fratres’, ‘알리나를 위하여Fur Alina’ 등이 듣는 이들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침잠하게 한다. 더 많은 위대한 생존 음악가들이 그래픽 노블로 기록되면 좋겠다. 이뤄낸 성과를 나열하는 영웅화 방식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일상을 보살피며, 내면의 불꽃을 잘 다스리며,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들며 나아간 음악가들이 창조적인 관점으로 쓰이면 좋겠다. 그것이 음악이라는 커다란 세계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다.
글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