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규, 끝없는 발레의 즐거움 속에서
해외 곳곳에 진출해 다양한 무용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무용수의 수가 200명을
훌쩍 넘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거나 한때
국위 선양으로까지 여겨지던 해외 진출이
이제는 당연히 여겨질 정도이니 짧은 시간 한국
무용수들의 성장은 경이로울 정도. 그러니 이
시점에 그의 활동상을 짚는 것이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다. 2011년부터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발레리노 최영규의 이야기다.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발레의 별빛> 갈라를 위해 내한한 그를 만났다.
올해 입단 15년 차인 최영규가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지 꼬박
10년이 됐다고 했다.
“발레는 끝이 없는 예술이에요. 파고 또 파도,
무언가가 계속해서 새롭게 발견되죠.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또 다르고,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발레라는 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적지 않은
시간 발레라는 예술을 해왔지만, 여전히 새롭게
발견되는 ‘무엇’ 때문에 힘들어도 어김없이 또
움직이게 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발레를
시작해 서른다섯이 된 지금까지, 처음 만난 춤이
어색해 문화센터 탈의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버티던 소년이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무용수로 우뚝 서기까지. 그 시간을 짚어봤다.
<지젤> 중 알브레히트 ⓒYounsik Kim/Het Nationale Ballet
처음 연습실에 발을 디디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여덟 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죠. 순천에서 나고 자라서 발레가 익숙한 환경은 아니었어요. 각종 예체능을 배울 수 있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처음 발레 클래스를 경험했죠. 누나가 먼저 발레를 시작했고, 어머니께서 너도 한번 해 보라고 하신 거였어요. 명절이면 어른들 앞에서 자주 재롱떨곤 했는데, 그 모습에서 소질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첫 수업 날, 그냥 너무 하기 싫어서 의자에 앉아 자는 척했던 기억이 나요. 흔들어 깨우는데도 일어나지 않아서 결국 선생님께서 저를 탈의실에 데려다 두셨죠. 그래도 두 번째, 세 번째 클래스는 거부감 없이 했어요. 음악에 맞춰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초등학교 3학년 겨울에 본격 서울로 향했어요. 4학년 일 년 동안은 엄청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콩쿠르도 많이 나갔죠. 5학년이 되고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비학교에 입학했어요. 본격 전공의 길을 걷게 된 거죠.
유망주로 주목받던 학창 시절을 지나 해외 발레단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열다섯 살에 스위스 취리히의 발레학교Tanz Akademie Zurich로 2년간 유학을 다녀왔어요. 외국에서 혼자 생활하고, 유럽의 문화를 받아들인 게 그때가 처음이죠. 그 경험으로 해외에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당시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유럽식 메소드는 너무나 생소하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죠. 그런데 점점 발레 안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고, 춤추는 방식도 조금 더 열려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해외 발레단에서 클래식 발레뿐만 아니라 새로운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직후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요.
학교 다닐 적부터 무릎에 염증이 생기는 슬개건염을 달고 살았는데, 쉬지 못하고 계속 무대에 오르다보니 만성이 된 거죠. 2년 정도 앓았고 반년은 소염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는데, 제가 너무 오래 아파하니까 발레단에서 검사를 해 보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호두까기 인형>에서 꽤 비중 있는 파드되를 맡은 차였는데 발레단에서는 너무 위험한 상황이라고, 당장 휴식해야 한다고 진단하더군요. 석 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잘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해야 하나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전화위복이었던 것 같아요. 석 달을 쉬고, 치료도 열심히 받고, 다시 춤추기 시작하니 괜찮더라고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으로 내 몸을 쓰는 방법에 관해 깊이 생각한 것 같아요. 아프지 않게, 무리하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사용하는 법을 연구하게 됐죠.
네덜란드와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노로서
발레단에 입단한 지 15년, 그리고 올해
수석무용수로 10년 차가 됐어요.
어떻게 보면 행운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물론 2016년 승급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니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오른 느낌도 있고요. 단장님만 아니라, 발레마스터, 그리고 관련한 분들이 좋게 봐주셨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더불어 인간관계에 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했죠. 제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죠.
발레는 어렵지 않았어요. 늘 해오던 것이니까요. 오히려 멘털 관리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됐죠. 하고 싶은 것을 못 할 때 가장 힘든 거거든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몸이 아플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또 제 상황으로 인해 누군가 대신 무대에 올라야 할 때 어떤 말을 건넬 것인지 등등…. 기분이 널뛰어 내 컨디션과 춤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공부도 하고 있어요.
네덜란드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가 워낙 풍부하기도 합니다만,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공연한 <레이몬다Raymonda>2022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레이철 보장Rachel Beaujean이 발레단을 위해 새로운 이야기와 안무로 재구성한 버전인데요. 팬데믹으로 인해 2년 넘도록 준비한 작품이라 유독 애정이 가기도 하고요. 제가 맡은 압둘라흐만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열정이 엄청난 캐릭터이고, 안무 면에서도 ‘맛있게’ 춤출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제게 어울리는 캐릭터로 꼽고 싶어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지젤Giselle>이요. 알브레히트가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막이 닫히는 마지막 장면에선 저 역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몰입하게 되죠. 상주안무가인 한스 판 마넨Hans van Manen의 작품은 대부분 좋아해요. 작품 안에 제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많거든요. 같은 안무가 주어지더라도 저만의 느낌을 낼 수 있죠. 저는 춤 안에 감정선이 뚜렷한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가장 인상 깊은 공연’에 수여하는 스완Swan상의 영광을 제게 가져다준 투르 판 스하이크Toer van Schayk의 작품 <교향곡 7번7th Symphony>도 애정이 깊습니다.
압둘라흐만 역을 연기한 <레이몬다> ⓒAltin Kaftira/Het Nationale Ballet
어떤 춤을 추는 무용수가 되고 싶나요.
관객마다 제 춤을 보고 느끼는 감상이 다를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어떤 한 번의 울림을 줄 수 있는 무용수가 되는 게 제 목표고요.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발레라는 고전의 춤을 동시대에 소구하고자
현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오늘날 이토록
고전적인 예술인 ‘발레’를 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나요.
클래식 발레란 참 오래된 예술이에요.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모던 발레나 컨템퍼러리 발레 같은 흐름이 생겨났고, 이후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죠. 고전은 고전만의 색깔이 있고,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상이 있어요. 클래식 발레만이 가진 색깔과 매력이 있기 때문에, 또 그러한 고전을 사랑하는 관객이 있기 때문에 사라질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런 고전을 토대로 의상이나 소품 등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좀 더 시대 흐름에 맞춰 세련되게 바꾸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영상물을 HD 화질로 즐기다가 이제 4K로 감상하는 것처럼, 고전 역시 다듬는polishing 작업이 필요하죠.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발레란 끝없는 예술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소화하는 데 있어 안무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혹은 내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가요.
안무가가 당초 의도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맞게 정확하게 수행하는 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내가 춤을 출 때 일정 범위 안에서 스스로 낼 수 있는 느낌이 있다면 발현하는 게 맞고요. 어떤 안무가는 안무만 제시하고 표현은 무용수의 영역으로 두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안무가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해요. 우선 의도를 충실히 파악하고, 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온전히 내게 주어진 역할이죠.
10년 전과 비교하면 국내에도 발레 관객층이 많이 탄탄해졌는데, 한국의 발레 지형이 보다 넓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국내에서도 작품을 좀 더 다양하게,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발레를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지겠죠. 다방면으로 교류가 이뤄져 클래식 발레와 모던·컨템퍼러리 발레, 해외 발레단이나 안무가의 작품 등 새로운 것들을 관객이 많이 경험할 수 있다면 전체 판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국에서도 자주 공연했지만,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나 이스라엘 안무가 호페시 셰흐터Hofesh Shechter의 작품만 봐도 정말 새롭고 충격적인 느낌을 주거든요. 크리스털 파이트Crystal Pite의 <스테이트먼트The Statement>2016, 웨인 맥그레거Wayne Mcgregor의 <유겐Yugen>2018 같은 작품도 너무 좋고요. 트리플 빌 형식으로 공연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서는 한스 판 마넨·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후앙호 아르케스Juanjo Arques의 작품을 한 무대에서 공연하기도 하는데, 그런 구성으로 공연을 보면 또 각 작품의 감상이 다르게 다가오거든요.
무용수의 생명력은 길지 않죠. 이후의 계획도 생각하고 있나요.
서른이 넘으니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선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려서 누군가의, 또 단체에서의 본보기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 세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또 그만큼 제가 남겨줄 것도 많아지리라는 생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건강하고 자유롭게 춤출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고요. 또 요즘 들어 관객분들께 더욱 다양한 발레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제 영향력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교류를 이루고 싶고요.
최영규의 인생에 있어 춤은 어떤 의미인가요
20대 때만 해도 발레가 물론 가장 좋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해 보려고 했어요. 취미도 다양하게 만들어보고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무언가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보다 발레를 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여기에 내 시간을 온전히 쏟는 게 당연하고, 즐겁고, 그래서 제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어요. 그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이제는 춤으로 하여금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어요. 제가 가진 것을 나눠줄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글 김태희 무용평론가
사진 Studio Ke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