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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11월호

선율과 판결 사이 예술가는 사업가여야 한다

얼마 전 2년 동안 진행한 한 작가의 정산금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작가가 전속 갤러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전속계약의 효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갤러리가 작가에게 약 6억 원과 미화 2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통상 정산금 청구 소송은 계약에 따라 지급받아야 할 금액을 산정하고, 미지급된 금액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달랐다. 작가는 갤러리로부터 정산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작품 판매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갤러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송은 ‘증거’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얼마나 가졌는지가 소송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정작 필요한 자료는 모두 상대방의 손에 있었으니 암흑 속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소송 과정에서 어렵게 확인한 실제 판매 금액을 보니 갤러리가 작가에게 알려준 작품 판매 금액과 실제 판매 금액 사이에는 무려 6억 원가량의 차이가 있었다. 정산금으로 따지면 약 3억 원에 가까운 돈이다.

작가는 갤러리를 믿고 작품을 맡긴다. 작가가 창작에 몰두하는 동안 갤러리는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해 그 대금을 정산한다. 서로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역할을 나눠 맡는 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번 분쟁의 책임은 계약에 따라 판매 내역을 알리고 정산금을 지급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갤러리에게 있다. 작가를 대신해 판매와 정산 업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갤러리의 잘못이지, 작가가 갤러리를 믿고 작품을 맡긴 것이 잘못일 리 없다. 다만 이 사건을 진행하면서 갤러리의 책임과는 별개로 작가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문화예술 분야의 법률 분쟁을 다루다보면 종종 비슷한 말을 듣는다.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언제, 어떤 작품을 갤러리에게 맡겼는지 기록하지 않았거나 혹은 정산 내역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다. “저는 그런 건 잘 몰랐어요.” 문화예술 변호사로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지 곁에서 지켜봐왔으니까. 창작에 몰두하다 보면 계약이나 정산·세금 같은 일은 낯설고 번거롭게 느껴질 것이다. 누군가 대신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내 권리를 알아서 지켜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런 무지와 무관심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 글을 빌려 작가들에게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술가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몰라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작가도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꾸려가는 한 사람의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를 사업가에 비유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예술은 순수해야 하고, 돈이나 경영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 순수함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비즈니스는 어떻게 하면 작품을 더 비싸게 팔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궁리하라는 뜻이 아니다. 창작 활동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계획하고 챙기는 것을 말한다.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지만 아니라 그 작품을 어디에 전시하고, 누구에게 판매를 맡기며, 어떤 조건으로 거래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도 작가의 몫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술 분야에서는 창작 이외의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예술가라면 그런 일에 서툴러도 괜찮다는 생각을 종종 마주한다. 물론 누구나 처음부터 계약이나 거래에 익숙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작가들에게 대단한 경영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의 목록을 정리하고, 언제 어느 갤러리에 어떤 작품을 맡겼는지 기록하고, 판매된 작품의 내역을 확인하는 것. 계약서를 작성했다면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보고, 약속한 정산일이 지났다면 대금이 제대로 지급됐는지 살펴보는 것.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시한 미술 분야 표준계약서에도 이러한 기본적인 절차가 마련돼 있다. 갤러리가 작품을 인도받을 때는 작품명과 상태 등이 기재된 인수증을 작가에게 교부하도록 하고, 판매 대금을 전액 수령한 후 1개월 이내에 정산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산할 때는 판매에 관한 사항이 기재된 내역서와 근거 자료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 작품을 맡기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서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이다.

이런 일들이 예술과 거리가 먼 단순한 행정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 목록은 작가가 걸어온 창작의 기록이고, 작품의 전시와 판매, 소장 이력은 작가의 경력을 이루는 중요한 자료다. 자기 작품이 어디에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게 소장됐는지 파악하는 것은 결국 작가로서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드는 데 쏟은 관심을 완성한 후에도 조금만 더 이어가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다.

예술가에게 비즈니스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예술의 순수성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작품과 권리를 잘 지킬 수 있어야 타인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창작을 오래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면 그 작품을 지키는 것 또한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 작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글 박주희 로펌 제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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