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아카이브 남의현
2025 웹진 [비유] 75호 작품 게재
소설을 쓰고 있는 남의현입니다.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관희는 거울 거울은 관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설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소설 속 한 장면을 처음으로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생각납니다.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장면 하나를 만드는 데 아주 많은 에너지를 쏟고, 거기에서 또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또 신났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더 써보라며 부추긴 것 같습니다.
‘스스로 예술가라고 느낀, 자각하게 된 경험’과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항상 헤매게 됩니다. 저는 예술가라는 자의식이 뚜렷하지 않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얼마 전까지 저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더 컸습니다. 직장에서는 소임을 다하고, 퇴근하면 집에서는 소설을 쓰려고 노력하고, 그러다보니 사는 게 힘들고……. 작년까지는 이런 생활을 했는데, 올해엔 일을 그만뒀어요. 그래서 건강하게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고, 요즘은 소설을 쓸 때 덜 힘들고 그래서 좋아요. 아무래도 저는 소설이 저에게 순수하게 즐거운 놀이일 때가 가장 좋습니다. 굳이 제 안에서 예술가에 가까운 무언가를 찾는다면, 소설 쓰기의 즐거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것은 선뜻 떠오르지 않지만,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이따금 저에게 되돌아오는 소설은 「온리 차일드」입니다. 「온리 차일드」는 외동으로 태어나 외동으로 죽을 차영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차영이 한 사람에 대한 소설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하나뿐인 친구이자 연인인 시온이가 죽은 이후에 차영이가 어떻게 자신의 슬픔을 내버려두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차영이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기를 응원한 것이 기억납니다.
거울을 봤는데 내가 귀여워서 깜짝 놀랐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관희가 더 귀엽긴 해.
관희랑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생겼지만 어떤 부분들은 명확히 다르다. 그런 부분들은 명확한 만큼이나 설명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극장에서 <개를 위한 노인 이름>을 두 번째로 관람하기 전까지, 우리조차 우리에게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두 번째 보았을 때의 느낌은 아주 달랐다. 첫 번째 보았을 때는 슬프고 쓸쓸했는데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쓸쓸하고 슬펐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다르다. 매일 밤마다 생각한다. 관희가 내 위에서 내 아래로 내려갈 때, 내가 관희 위에서 관희 아래로 내려갈 때 곰곰이.
세면대에 거품을 뱉고 젖은 칫솔도 잘 걸어 두고 침대로 갔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차례인데, 그러니까, 누워있는 관희 위에 올라타서 가만히 지켜보기. 귀여운 관희 얼굴 위에 귀여운 내 얼굴, 그러니까 관희와 나는 서로의 얼굴.
- 「관희는 거울 거울은 관희」
시온이가 죽기 직전 농담을 했는데 차영이는 웃느라고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까먹어버렸다. 단번에 알아듣고 웃었으니까 둘이 평소에 나누었던 농담이겠지? 그리고 어려운 농담은 아니었을 것이다. 차영이는 평소에 머리를 잘 안 쓰니까.
차영이는 사실 웃기 싫었다. 시온이가 한 말 까먹을까봐. 그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시온이가 슬퍼할까봐. 웃지 않는 차영이 얼굴 보고. 웃는 차영이 얼굴도 못 보고 시온이가 숨을 거두었으니까 차영이는 아 괜히 웃었나 싶었다. 그리고 눈 감은 시온이 얼굴 내려다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또 한발 빠르군. 잠시 뒤에 또 생각을 했다. 또 한발 느리군. 늘 시온이가 먼저 걷고 차영이가 뒤따라 걷고. 시온이가 먼저 늙고 차영이가 뒤따라 늙고. 너의 머리통이 반 조각나면 나의 것도 그렇게 할까? 이런 농담도 시온이가 먼저 하고 차영이가 뒤따라 하고. 아냐, 나의 머리통이 반 조각나면 너의 것을 그렇게 해줄게.
- 「온리 차일드」
그냥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미지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얀 공이 무언가를 박살 내고, 어떤 공간에 떨어지고, 그 공간의 안과 밖에 빛이 가득하고……. 그러한 근원적인 이미지들이 왜인지 제 안에 있고, 또 사라지지 않아서 그것들을 언어로 해소하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제 쓰기의 동력 중 하나였어요. 지나치게 자기 만족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요. 최근에는 그 이미지들이 소설 안에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이어지기도 한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지나치게 튼튼하거나 지나치게 연약한 사람의 형태로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소설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인상 깊게 본 작품은 펴자마자 단숨에 읽은 한 권의 책인데,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의 『어느 하루』입니다. 왜 그렇게 멈추지 않고 책장을 연달아 넘기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꽤 단순한데, 요즘 제게 필요했던 이야기하기의 방식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기이하고 슬픈 이야기들이 있어, 그런데 그 일들이 그냥 일어나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그 사실을 이렇게 문장으로 쓸 수 있어’ 하는 단호함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문장들은 큰 힘을 가져서 어떤 사람의 인생을 아주 나쁘게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문장들이 역시 큰 힘을 가졌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을 두고 ‘그것들은 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뒤집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감각이 좋습니다.
최근에는 1934년에 태어난 한 여자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느낍니다. 하루에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이봐,”로 시작하는 문장을 자꾸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에게 말을 걸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제가 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은 건지 아직 모르겠어요. 요즘 소설 쓰기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든 대답을 듣기 위해 계속 써보려고 합니다.
정리 나혜린 서울문화재단 커뮤니케이션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