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문화+서울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사람과 사람

10월호

예술이 흐르는 길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패할 시간을 지켜주는 일

정해진 커리큘럼도, 만들어야 할 결과물도, 수료도, 평가도 없는 곳을 교육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프로젝토리PROJECTORY’는 조금 낯선 이 질문에서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을 구상하며 재단이 오래 고민한 것도 무엇을 더 채울지가 아니라, 무엇을 미리 정하지 않을 것인가였다.

프로젝토리의 멤버인 청소년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스스로 정하고 필요한 도구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잠시 멈춰도 되고, 다른 길에서 다시 시작해도 된다. ‘크루’로 불리는 어른은 안전과 장비를 살피고 필요할 때 손을 내밀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대신 정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완성했는지만큼, 무엇을 궁금해하고 시도했는지,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방향으로 다시 나아갔는지가 중요하다.

2012년 설립된 NC문화재단은 2017년 말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여러 답을 살펴본 끝에 마음에 남은 것은 무언가를 더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청소년이 자기 안의 관심을 발견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지켜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2020년 대학로에 프로젝토리의 첫 문을 열었다.

그 선택의 바탕에는 창의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있다.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이나 뛰어난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질문을 발견하고 방향을 선택하며, 실패한 뒤에도 다시 시도하는 힘에 가깝다. 지금 청소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활동 하나를 보태는 일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백인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은 청소년기 이후에도 필요하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방향을 세상에서 시험하는 일은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워진다. 청년 예술인에게는 작품을 구상하는 능력만큼 그것을 실제 무대에 올려볼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연장과 제작비, 관객을 만날 기회가 넉넉하지 않은 현실에서 한 번의 실패는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큰 비용이 되곤 한다.

2025년 시작한 ‘STAGE 100’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청년예술인이 완성도나 흥행 가능성을 먼저 증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작업을 무대에서 시험하고 관객과 만날 수 있도록 마련한 NC문화재단의 공연예술 플랫폼이다. 음악으로 시작해 연극까지 영역을 넓혔고, 선발팀에는 공연장과 제작비는 물론 홍보, 조명·음향, 운영 등 공연에 필요한 손길을 함께 보탠다.

무대를 내어주는 방식도 장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음악 분야의 청년 아티스트는 약 90분 동안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단독 공연을 펼친다. 연극 분야에서는 비정형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온 단체가 한 달간 연극제에서 각 3회 공연하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이미 완성된 작품을 골라 소개하기보다, 창작자가 직접 부딪치고 관객의 반응을 만나며 다음 작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실험실에 가깝다.

프로젝토리가 청소년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발견하는 시간’을 건넨다면, STAGE 100은 청년예술인에게 ‘발견한 방향을 세상 앞에서 시험하는 기회’를 건넨다. 대상과 형식은 다르지만, 두 사업은 하나의 믿음으로 이어져 있다. 창의성은 정답을 가르쳐 만들어내는 결과라기보다,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 천천히 자란다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간을 어떻게 오래 지켜낼 수 있을까. 공공 재단은 공적 자원이 어디에, 왜 쓰이는지 시민에게 설명하고 사업의 형평성과 지속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기업 재단은 아직 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시도를 조금 먼저 시작하고, 실패의 부담을 나누어 맡아볼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책임과 시간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그 차이에서 협력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NC문화재단과 서울문화재단은 올해 8월 업무협약을 맺고, STAGE 100에서 만난 작품을 서울문화재단의 공연 전 쇼케이스 ‘제철연극’과 연결하기로 했으며, ‘대-락樂로’ 캠페인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기업 재단이 아직 작은 가능성에 첫 무대를 내어준다면, 공공 재단은 그것이 더 많은 시민과 만나고 다음 기회로 이어지도록 길을 넓힌다. 서로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기보다, 각자의 시간표로 하나의 성장 경로를 함께 만들어가는 셈이다.

지난 5년간 프로젝토리를 거쳐 간 청소년 1,500여 명은 약 2만 개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5만 5천 시간의 탐색과 실험을 이어왔다.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그중 누가 자신의 관심을 발견하고 다시 시도할 용기를 얻었는지는 지표만으로 알기 어렵다. STAGE 100 무대에 오른 청년예술인의 작업이 어디로 이어질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모든 성장에는 결과로 증명되기 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업 재단이 그 시간을 먼저 열고 공공 재단이 그 안에서 발견될 가능성을 더 넓은 사회로 이어갈 수 있다면, 창의성은 한 사람의 경험을 넘어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글 박명진 NC문화재단 이사장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