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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아는 맛과 모르는 맛

TV 프로그램 <나는 솔로>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극사실주의 데이팅 프로그램”을 표방한 <나는 솔로>는 일반인 남녀 각각 여섯 명이 5박 6일간 함께 지내며 짝짓기하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최근 16기 ‘돌싱 특집’이 화제가 되는 바람에 이 프로그램을 보지 않던 이들까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나는 솔로>의 특징은 출연자에게 가명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일반인 출연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함이겠지요. 첫 등장에서 가명을 부여받은 이들은 최종 선택의 순간에야 자신이 선택한 상대에게 자신의 본명을 속삭입니다. 가명은 크게 ‘영’ 돌림(영숙·영자·영호·영수·영식·영철)과 ‘정’ 돌림(정수·정식·정순·정자)으로 구성되며, 이후 후자가 상철·광수·정숙·현숙·옥순·순자로 재편되었습니다. 모두 이전 세대에 유행하던 이름들입니다.

출연자들도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이름들이지만 기수마다 반복 사용되면서 각 인물의 특성이 유형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수는 해당 기수 내 최고령자 남성, 영호는 어리고 귀여운 남성, 상철은 푸근한 이미지의 남성, 영철은 마초 같은 남성, 옥순은 화려한 미모의 여성, 현숙은 친구같이 편안한 여성, 영자는 발랄한 여성 등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이 상당히 또렷해지면서 패널이나 시청자뿐 아니라 출연자들까지도 ‘영철이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옥순이답네’라고 실시간 품평합니다. 말하자면 캐릭터 혹은 배역이 된 가명은 출연자와 시청자가 낯선 인물을 알아갈 긴 시간을 축약시켜 본론, 그러니까 연애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유형화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대한 불확실성을 타개하고 무수한 개체들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마주치는 모든 것을 유형화합니다. 사람도요. 아마 사람이야말로 가장 다양한 방식으로 유형화된 개체일지도 모릅니다. 인종, 혈액형, 별자리, MBTI, 사주 모두 인간의 유형화 아닌가요? 예전엔 남녀가 만난 자리에서 혈액형과 별자리가 대화의 물꼬를 열었다면, 이제는 단연 MBTI겠지요.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파악해온 역사는 깁니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인 공기·물·불·흙이 인체에서 각각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이 되며, 네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다고 보았습니다. 뭐든 균형을 이루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특정 요소가 우세할 경우 건강뿐 아니라 성격까지 변한다는 관점으로 발전했다는 점은 특이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관점을 계승한 갈레노스는 어떤 체액이 우세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격이 유형화된다고 보았습니다. 혈액이 우세한 체질은 열정적이고 과감하며, 점액 체질은 아둔하고 게으르고, 황담즙 체질은 용감하고 정력이 왕성하고, 흑담즙 체질은 고집이 세고 우울하다는 것이지요. 지금으로선 근거가 없습니다만 당시로선 꽤 그럴싸한 가설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사회나 누군가는 열정적이거나 게으르거나 용감하거나 우울할 테니까요.

공연예술에서도 인간을 특정 방식으로 유형화하고 구체적인 캐릭터로 전형화하는 관습이 쉽게 발견됩니다. 경극이나 발레,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처럼 역사가 길고 대중적인 장르에선 공연자와 관객이 공유하는 캐릭터가 확고한 편입니다.

중국의 전통극인 경극은 배역이 크게 생·단·정·말·추로 구분되고, 가면의 색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붉은색은 용감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청색은 사납고 고집스러운 사람, 흑색은 충직하며, 백색은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을 뜻합니다. 경극을 즐겨보는 관객은 배우의 가면색만 보아도 그가 어떠한 인물이며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전통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캐릭터들로 북적입니다. 색동옷을 입고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몸 개그를 펼치는 교활한 하인 아를레키노, 베네치아 출신의 욕심 많은 구두쇠 노인 판타로네, 허풍선이 겁쟁이 군인 카피타노, 지식 자랑을 늘어놓는 박사 독토레, 교활하고 희극적인 하녀 콜롬비나 등이 있습니다. 대단한 줄거리가 있다기보다는 생생한 캐릭터들이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티키타카’와 몸 개그가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볼거리입니다.

이처럼 전형적인 인물이 중요한 장르에서 관객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즐깁니다. 단골 식당의 익숙한 요리를 먹고 행복해지듯, 관객은 원한 것과 예측한 것을 보고 행복해집니다. 대체로 관객들은 공연자만큼이나 그 장르에 박식하며, 공연자가 전형을 완벽하게 구현할 때 만족합니다. 공주는 공주답고, 무사는 무사다우며, 악인은 악인다운 세상인 거죠.

하지만 현실에선 누구도 전형에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복잡한 존재니까요. 이를 납작하고 단편적인 전형에 꿰맞출 경우 제대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나아가 인물이 전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개성을 지울 가능성도 있습니다. 회사 면접에서 특정 MBTI 유형을 선호한다거나, 이를 이용해 자신의 MBTI 유형을 바꾸어 말하는 사례는 전형이 지닌 위험을 보여줍니다.

현대로 올수록 전형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날 관객은 전형적인 인물보다는 예측한 대로만 움직이지는 않는 인물,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인물에 관심을 가집니다. 착한 사람이 끝까지 착하고 나쁜 사람이 끝까지 나쁘다면 재미없어서 어떻게 보나요? 심지어 예술 작품 자체도 예측 가능성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정확히 알고 이미 기대했던 것을 보는 것에서 나아가 예상할 수 없던 경험을 하기 위해 공연장을, 미술관을 찾습니다. 옥주현 씨가 말하듯 먹어봤자 내가 이미 아는 맛, 먹어서 뭐 하냐는 논리랄까요.

아는 맛과 모르는 맛 모두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아는 맛만 계속 먹는다면 편협해질 수 있고 모르는 맛만 계속 먹는다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아는 맛을 안다고 치부하지 않고 모르는 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타인도, 세상도, 예술도.

정옥희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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