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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나의 지난날, 우리의 지난날

후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자꾸만 후회되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정말이지 자주 후회한다. 부모님께 더 잘할 걸, 시험 전날 놀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할 걸, 어제 만난 그 사람에게 그 말은 뭐 하러 했지… 평범한 수준이라면 크게 고민하지는 않을 것 같다. 후회되는 순간이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문제는 첫째, 얼마나 오래된 일까지 후회하는가, 둘째, 얼마나 사소한 일까지 후회하는가, 하는 거다.

대학교 2학년 때 귀여운 여자 후배가 우리 과에 들어왔다. 그 친구는 눈에 띌 만한 개성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처음 선배가 되어 후배를 만나는 자리가 어색했던 나는 “혹시 성형수술을 고려해본 적은 없어요?”라는 덜떨어진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네, 저는 제 얼굴이 좋아요.” 하고 웃던 그 친구의 해맑은 얼굴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술만 마시면 그 일을 굳이 꺼내 미안하다고 수십 번 말한 일까지 포함해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한심스러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계속 후회하려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신발주머니를 신나게 흔들며 등교하던 나는 먼저 도착해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발견했다. 장난이랍시고 신발주머니로 엉덩이를 살짝 쳤는데 가방 안에 있던 내용물이 갑자기 쏠리면서 친구가 앞으로 수그러질 만큼 세게 타격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내가 아는 친구가 아니라 뒷모습이 비슷한 모르는 아이였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교실로 도망치고 말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걸 이십몇 년째 후회하고 있다면?

해결되지 않은 미안함이라는 감정 때문에 오래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일 말고도 ‘아, 한 달 전 모임에서 내가 했던 농담에 이 말까지 덧붙였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유형도 있다. 무슨 코미디언도 아닌데. 친구들과 술 마시면서 나눈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각종 토론에서 ‘아, 그때 이 논리를 적용했어야 하는데’ 유형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사사로운 지난날을 오래도록 떠올리는 걸까. 정말 피로하다.

그렇다고 기억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그저 더 나은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한 순간에 한정하여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책하는 일이 많다. 아주 어렸으니 그럴 수 있다며 덮어둘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잊을 법도 한데 나의 기억 안에서 ‘과거의 나’는 자꾸만 덜떨어진, 부족한 인간으로 다운그레이드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동창회 같은 것을 질색한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미성숙했던 내 과거를 아는 누군가를 마주치면 순간 도망갈 궁리를 한다. 대부분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유재하의 <지난날>1987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 어쩌면 작사가인 그가 나와 비슷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어디 누가 이유라는 탓하면 뭘 해 / 잘했었건 못했었건 간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 세상 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작사가는 이미 어느 지난날을 떠올렸고, 그것이 언제 어디 누구의 탓인지 혼자 따져보았다. 그렇기에 ‘그럼 뭘 해’라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다. 당신이 (그러니까 ‘내’가) 후회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의미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듯 좀 더 아름답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말한다. 좋았던 일들도 떠올려 봐, 행복해질 수도 있어, 하는 담백한 자기 위로.

다시 못 올 지난날을 난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하리 / 아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날

후렴구에서 확실해진다. ‘-하리’라는 어미는 다짐이다. 난 나의 지난날을 꾸밈없이 간직하겠다는 다짐.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영원만큼이나 오래. 앞서 했던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행위 자체로 편안해져 보자는 자기 주문. 유재하라는 인물과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내가 듣는 <지난날>은 이러한 이야기다.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그대와 나의 지난날

내가 자주 하는 후회 행위들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진다. 예컨대 고3 때 내가 공부를 못해서 재수한 일은 별로 후회되지 않는다. 야식으로 매운 음식을 먹어 얼굴이 붓고 배가 아픈 날들은 그다지 오래 기억할 만한 사건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좀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후회를 만든다. 아주 작은 상처도 주고 싶지 않은 마음, 그가 나를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그러니 내가 떠올려야 할 아름다운 지난날은 그저 ‘나의 지난날’이 아닌 ‘그대와 나의 지난날’이다.

대중음악인들이 ‘D 브리지’라고 부르는 곡의 후반부 하이라이트의 가사는 “생각 없이 헛되이 지낸다고 하지 말아요 /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이다. ‘브리지’라는 말처럼 연결구 역할을 하며, 그동안 했던 이야기를 환기하는 기능을 해서인지 나를 포함한 여러 작사가가 가장 솔직한 마음을 이 대목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사가도 있으며, 유재하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옛일만 떠올리며 헛되이 지내는 듯 보이겠지만─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건 싫다는 선언(고음으로 부르기에)처럼 들린다. 지난 일은 뒤로한 채 앞으로만 간다고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약간의 투덜댐도 포함한다.

이 음악을 만들고 부른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고 한다. 그 시대를 겪지 않은 후대의 감상자는 이 노래 속 경쾌함과 따뜻함만으로 그저 행복해진다.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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