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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 보일 때

모든 프로그램의 처음 모습은 종이에 누운 활자이다. (…) 누군가가 쓴 한 장의 기획안이었다.→30쪽

시작이 미약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기획안 한 장에서, 스쳐 간 약속에서, 포기했다가 한 번만 더 해 보기로 한 순간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그것이 어떤 시작인지 모른 채로 그냥 한 사람들은 이렇게 답한다. “시작은 우연이었고요, 그냥… 그냥 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내 시작이 미약해 보일 때 그렇다. 한없이 쪼그라드는 그런 날, 나를 앉혀놓고서 잠시 시름을 잊게 해줬던 영상 콘텐츠를 만든 이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단다. 이번엔 보는 게 아닌, 들어볼 차례다.

나와 친구들이 열광했던 <스트릿 우먼 파이터>부터 우리 사회에 많은 화두를 던져준 드라마 , 엄마가 소녀의 마음으로 몰입하던 <옷소매 붉은 끝동>까지. 목차에는 알은체가 절로 나오는 프로그램부터 조금은 낯선 프로그램까지 총 10편의 타이틀과 제작진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시청률이나 화제성을 따져 보면 결코 흥행작만 있다고 할 순 없는데, 과연 어떤 기준으로 모은 걸까? 분야도 다양하다. TV 예능, 유튜브 웹 예능, OTT 드라마, 사극, 현대극… 『기획하는 일, 만드는 일』은 서두에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여기엔 성공의 필살기도 없고, 영웅담은 더더욱 아니라고.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옆에 앉아보았다.

장수연 PD: <아무튼 출근!>도 구석구석 손이 많이 간 게 느껴졌어요. 마지막에 나오는 텔럽telop을 보니 누군가의 손글씨던데, 이것도 의도가 담긴 디자인이었죠?

정다히 PD: 맞아요. 우리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제작진들 역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분들의 손글씨를 받아서 텔럽을 만들었죠. 본인 이름을 직접 써서 프로그램에 흔적을 남길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어요→35쪽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프로그램의 좋고 나쁨은 출연자 개개인의 역량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말실수라도 하면 개인을 매섭게 비난했고, 사려 깊음을 볼 땐 열렬한 팬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볼 일이었다. 완성된 창작물이 최종 승인이 나 세상에 내보여지는 건 제작진 또한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수연 PD는 그 지점에 주목하는 인터뷰어였다. 영상에서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했던 사려 깊은 부분을 콕 집어냈고 현장에서 중시하는 역량에 관해 물었으며, 그들이 다 쏟아낸 에너지를 어디서 다시 채우는지 걱정 어린 질문을 건넸다. 인터뷰이들은 이제 막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을 마쳤거나 최선을 다했지만 종영이라는 수순을 밟게 된 이도 있었는데, 이들은 저마다의 프로그램을 복기한 뒤 담백한 답을 내놓았다.

장수연 PD: 정 PD가 담은 소신은 무엇이었을까요? 밥벌이, 특히 MZ세대의 밥벌이를 보여주자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정다히PD: 직업 혹은 직장에 대한 생각이 제일 많이 변한 세대가 MZ세대라고 생각했어요. (…) 가볍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무거운 이유들이 있어요. 항상 ‘다음 스텝’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세대예요.→37쪽

이성준 PD: (PD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말하는 데 힘을 다 쓰는 사람, 듣는 힘이 없는 사람은 PD로서 어렵겠구나 싶어요.→161쪽

여기 실린 인터뷰이들은 미디어에서 꽤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추켜올려진다.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겠으나 책에서 만난 모습만큼은 정말이지 그저 책임 있게, 끝없이 조율하고, 듣고, 밀고 나가는 ‘직업인’이었다. 함께하고 싶은 주인공을 묵묵히 3년을 기다려 프로그램을 런칭하고(<공부왕찐천재 홍진경>), 핀 조명의 각도를 바꿔 가수 옆 댄서들을 비췄으며(<스트릿 우먼 파이터>), 모두가 성공이라고 말했지만(<작은 아씨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고민이 남았다고 말하는 직업인 한 명 한 명이 거기 있었다. 이들이 흔들리고 넘어진 지점은 오늘 내가 회사에서 휘청했던 지점과 똑같았다.

인터뷰집은 어떻게 보면 만들기 쉬울 것 같지만, 무척 난도가 높다. 그 까닭은 첫째, 인터뷰어의 질문이 좋아야 하고 둘째,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합이 좋아야 하며 셋째, 들은 이야기를 잘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기 드물게 세 가지가 적절히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업계 동료이면서 앞에 앉은 이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가진 장수연 PD가 건네는 질문은 반복되지 않았고,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보이는 관계 덕에 궁금했던 이야기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바라봄을 앎으로 확장시킨다. 그 사람이 치르고 있는 힘든 싸움을 짐작해보고 싶게 만든다.→47쪽

오랜 시간 TV 앞을 떠나 있었다. 생업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으리으리한 집과 훌쩍 떠나는 여행, 끝없는 맛집 투어 속에서 시대를 읽지 못한 유머를 구사하는 일부 몇몇을 바라보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그때나 지금이나 ‘최소한 어제보다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애써왔다.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점점 더 내 세계가 확고해짐을 느끼는 요즘, 나의 이 작은 세계에 좋은 창작물을 더 많이 들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창작물이 내게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인터뷰에선 제작진이라고 뭉뚱그려 소개된 수많은 이들이 수년 뒤 더 책임 있는 자리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낼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모니터와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엔 좀 아쉽다. 5분만 더 봐야지. 끝까지 보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

손정승 『아무튼, 드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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