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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몰입을 이끄는 ‘세계들’

지금의 우리는 늘 어딘가에 취해 있는 것 같다고, 새로 만난 큐레이터가 그렇게 말했다. 온갖 화려한 것들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누군가는 마약에 취하고… 그러다 피곤해지면 벽난로 이미지나 몇 시간 연속 재생 명상음악 같은 콘텐츠를 틀어놓고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비움이 아닌 쾌락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고, 시끄러운 카페에 앉아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한 시간이 넘도록 떠들었다.

집에 돌아가려고 차에 오르니 갑작스러운 고요함과 함께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 정말로 가만히 있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과 조금 전 화면으로 본 무의미한 이미지의 조각들이 뒤섞여 눈을 감아도 눈앞에 뭔가가 보이는 기분이다.

“그곳은 골수까지 탐미적이었다. 모든 것은 반짝거리도록 강요당했다. 말러는 이런 사치스럽고 애매모호한 순간에 최고의 음악적 표현을 부여했다. 그는 이 도시의 표면 뒤에 숨어 있는 균열이 곧 터져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를 변형시키는 예술의 힘을 여전히 믿었다.”(알렉스 로스 저, 『나머지는 소음이다』, 21세기북스, 39~40쪽)

말러의 교향곡 5번 중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를 근래 여러 매체를 통해 들으며 마음을 잠깐 내어주기에 너무나 훌륭한 대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12분도, 7분도 될 수 있는 이 곡은 하프와 현악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 아름다움의 극치, 슬픔의 극한을 들려주는데, 일상의 풍경이 멈추고 완전히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새로운 감정적 동요가 시작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유의미한 도취. 마음에 강렬한 파도를 만들고 그 여운이 아무런 쓴맛도 남기지 않는,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이러한 경험이란 정말이지 찾아보기 어렵다. 산이나 바다 앞에서 혹은 뛰어난 미술 작품을 마주했을 때 정도가 있으려나.

이 곡은 최근 영화 <타르TAR>2023와 <헤어질 결심>2022에 등장했다. <타르>의 주인공 리디아 타르,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서래와 해준 모두 우아하게 취해 있는 인물이다.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이 연기한 리디아 타르는 겉으로는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도취해 있다. 말러에, 권력에. 무엇보다 말러와 권력을 양손에 쥔 자기 자신에. 영화 초반의 인터뷰 장면에서 타르는 지휘자란 시간을 다루는 (전지전능한) 존재임을 주지한다. 자신의 스승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이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12분에 걸쳐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연주한 사실을 언급하며 자신은 7분 길이로 표현할 것임을 밝히기도 한다. 죽음이 아닌 사랑을 묘사하며.

타르는 음악에 취한 뛰어난 예술가지만 그 위대한 음악과 자신을 동일시한 나머지 천천히 추락하고 만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사랑’이란 황홀하거나 아름답지 않고 권력에 의해 찌그러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의 예상과 영화의 관습을 뒤엎고 또 뒤엎는다. 타르는 결코 선인이 아니지만 그 인물에게 몰입하면 그의 마음속 깊숙한 슬픔, 혼란스러움에도 공감할 수 있다. 타르는 마치 안갯속 같은 아다지에토 안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나 아마도 다시 스코어를 넘겨가며 박자를 새어가며 길을 찾을 것이다. 타르는 그런 인물이다.

영화는 부제처럼 내건 말러 5번 중 어느 한 곡도 제대로 들려주지는 않지만,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타르>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에서 아다지에토 악장의 리허설 신을 다시 들을 수 있다. 타르는 단원들을 향해 “이렇게 단조로워서는 안 된다, 더 혼란스러워야 하고 압박감이 느껴져야 한다”고 주문한다. “가슴이 터져라 노래하는 것처럼.” 그 열정의 주문이 리허설 연주와 함께 하나의 트랙으로 남았다. 극 중에서 타르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따라 맞춘 파란색 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이 표지에 담겼다. 이쯤 되니 타르가 꼭 실존하는 음악가처럼 느껴진다.

이 곡의 온전한 감상을 원한다면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데, 베르나르트 하이팅크Bernard Haitink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아다지에토(Philips)는 무려 14분에 이르는 연주로 가장 느린 기록을 보유한다. 쾰른에서 말러가 지휘하는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Gurzenich Orchester Koln의 초연 무대를 직접 보았던 빌럼 멩엘베르흐Josef Willem Mengelberg와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각각 7분 남짓으로 해석했고, 말러 작품으로 수많은 명연을 남긴 레너드 번스타인과 빈 필하모닉의 1987년 연주(DG)가 오랫동안 회자한다.

<헤어질 결심>에는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해준이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달리는 차 뒷자리에서 두 사람이 서로 손을 포갠 장면에서 두 번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름답게 취한 사랑의 주인공들이다. 그 과정에 살인이나 폭력, 외도 등이 난무하지만 이미 두 사람에게 완전히 몰입한 관객에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서래와 해준의 복잡한 감정의 뒤엉킴이 말러의 이 곡과 잘 어우러진다. 서래는 사랑을 확신한 채 애를 쓰다 끝내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기로 한다. 해준은 사랑을 부정하다 마지막 순간 어떻게든 사랑을 이루어보려 발버둥친다. 아름답지만도 슬프지만도 않은 찬란하고 처연한 삶의 어느 순간을 <헤어질 결심>은, 그리고 말러의 5번 4악장은 들려준다.

실제로 말러가 이 곡을 작곡할 때 그는 알마 신들러Alma Schindler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시에 병세가 악화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경험한 상태였다. 이러한 작곡 배경 그리고 아다지에토(아다지오보다 조금 빠르게 연주하라는 뜻)라는 부제, 매우 느리게sehr langsam라는 악보 첫머리의 지시어가 음악가마다 다른 해석을 낳게 한 것이다. 말러의 이 곡이 장송곡처럼 들려도, 혹은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처럼 들려도 어느 쪽도 맞거나 틀린 게 아니다. 말러가 자신의 복잡한 심상으로부터 지어 올린 이 서사로부터 우리는 느끼고 싶은 걸 그대로 느끼면 된다. 자유는 듣는 이에게 있다.

아다지에토 외에도 말러 교향곡의 느린 악장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이룬다. 고통이 깃든 천상의 세계를 그린 4번 3악장, 죽음을 향한 정화된 두려움을 묘사한 9번 4악장 같은 고차원의 몰입을 이끄는 세계들이 있다. 말러는 백 년 후 사람들이 일상의 어지럼증을 잊기 위해 자신의 음악을 재생할 거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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