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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2.5cm 세계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친구에게 손편지를 보낼 일이 있어 우체국에 갔다. 이것저것 넣은 터라 무게가 달라서 그에 따른 우표를 고를 생각에 신이 났는데, 아뿔싸.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평소처럼 카드를 넣고 요금 결제를 마쳤다. 직원은 곧장 우표 자리에 큼지막한 바코드 라벨을 휘리릭 붙여 노란 박스에 넣었다. 아, 안 돼! 저건 우표가 아니라고요! 우체국을 나서는 내 발걸음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바코드 우표 말고 그림으로 된 우표가 아직도 나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을 때마다 나와 다르고도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자꾸만 깨닫는다. 내게 바코드 라벨은 우표가 아니며, 그림으로 된 우표만 우표이거늘.
→ 7쪽

나와 똑같은 지점에서 똑같이 생각한 사람이 있다니. 공감받기 어려울 것 같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도 반갑고 기쁜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랐다. 실물 책을 보고서야 ‘헉, 맞아. 왜 이런 책이 없었지?’ 하고 깨닫게 되는 책이 있는데, 『이상하고 소란스러운 우표의 세계』2023(서은경 저, 현암사)도 그랬다. 내가 아는 한 우표 수집에 관한 국내 에세이는 이 책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흐릿하게나마 ‘우취인’(우표를 수집하고 학문적 취미로 두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품고 사는 나이기에 구매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혹시 현재 일반 우표의 모양과 값을 아시는가? 2021년 가을부터 통용되는 일반 우표는 큰 태극 문양 바탕에 훈민정음이 새겨진 430원짜리라고 한다. ‘라고 한다’를 쓰는 까닭은 나 또한 마지막으로 받은 실물 우표가 태극기가 그려진 330원짜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까지 우표를 받아본 사람일 만큼, 우리는 우표로부터 멀어져 있다. 편지를 쓰지 않게 되자 우편함에는 각종 고지서만 쌓이게 되었고(이마저도 전자 고지서로 바뀌고 있다), 길가에 우체통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급기야 우체국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동네 우체국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곳까지 열심히 걸어가 무작정 기다리기를 여러 번, 우체국은 은행만큼이나 마음먹고 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속도와 빈도로 우체국 문턱을 넘나드는 이들이 있다. 우표 발행일(초일)에 맞춰서 우체국 앞에 줄을 서고, 그렇게 들어간 우체국 한 귀퉁이에서 우표와 함께 제작된 짝꿍 도장을 초일 엽서에 찍는다. 전국 팔도 우체국에 있는 관광인을 찍기 위한 여행 계획을 짜고, 서울에 들를 일이 생기면 우표 발행일에 맞춰 서울중앙우체국으로 향한다. ‘맥시멈 카드’라고 해서 우표, 엽서, 소인을 완벽히 갖춘 엽서 한 장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 포스트크로싱postcrossing을 통해 예쁜 엽서와 우표를 주고받기도 한다. 우표 수집이라고 하면 어쩐지 어르신이 수그린 채 우표수집책을 살피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실제는 상상과 전혀 반대의 모습이다. 이들은 조용하게, 누구보다 멀리 뻗어나가 적극적으로 날마다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 발 디딘 2.5cm 세계에서 다음 2.5cm 세계로 폴짝 뛰어넘으면서.

도장을 찍겠다고 우체국에 갈 때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어차피 모든 취미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로 대답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 53쪽

책은 간헐적 우취인인 내게 다채로운 지식을 알려주었다. 우표 전지(큰 한 장)에서 우표를 몇 장 쓰고 남은 부분을 가질 때엔 자연스레 여백 그림이 예쁜 쪽을 남기게 되는데, 그 여백의 이름은 ‘변지’이며 변지의 각종 요소를 고려해 모으는 우취인이 많다는 것. 현재 우체국에는 옛 우표를 동일한 액면가의 새 우표와 교환해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 우표 안에 소인이 동그랗게 온전히 찍힌 걸 ‘만월’이라 부른다는 것. ‘체인카드’ 놀이라고 해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한 주제의 우표를 릴레이식으로 모아 한 장의 엽서를 만든다는 것. 이런 이야기는 책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테다. 저자가 부려둔 지식과 수집 에피소드를 찬찬히 읽는 동안 마음 한구석에서 애틋함이 일었다. 누군가 다루지 않은 주제로 책을 낼 때의 큰 사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얼마나 재밌는지 알려주고 싶고, 내 설명이 혹시 틀리진 않을까 걱정하고, 기본 용어를 설명하면서도 어려워 보이는 말에 행여 발도 안 들일까 봐 이런 거 몰라도 재밌다는 걸 누차 강조하고, 혹 관심이 생기거든 한 명이라도 더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 나 또한 『아무튼, 드럼』2022(위고)을 쓸 때 같은 마음이었기에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예쁜 우표가 한국에서 아직 나오고 있고, 이렇게 예쁜 도장이 우체국에 나온다는 사실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
→ 51쪽

우취인의 세계는 굳건하지만, 다른 취미에 비하면 한 줌 인구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이런 책이 없을 거란 확신이 몹시 아쉬우면서도, 그러므로 이 한 권의 책이 오래도록 읽히길 바랄 뿐이다. 이 책은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우표를 수집하던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운명의 친구 같을 테니까. 더 더워지기 전에 가보면 좋을 손편지 관련 장소를 몇 곳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어쩐지 이번 글은 독자분들께 예쁜 우표를 하나 붙여 편지를 부친 기분이다.

우표박물관

중구 소공로 70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주 월요일·공휴일 휴무

서울중앙우체국

중구 소공로 70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주 토·일요일 휴무

엽서 라이브러리 ‘포셋’

서대문구 증가로 18, 305호
오후 12시부터 8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무

손정승 『아무튼, 드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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