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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책이 소개해준
‘구체적인 얼굴들’

지금, 이 글은 일본 도쿄에서 쓰고 있다. 사는 걸 흉내 내는 두 달짜리 여행을 온 것이다. 퇴사 후 한정된 돈으로 짧게 멀리 갈 것이냐 가까운 곳을 길게 갈 것이냐를 정해야 했을 때 나는 후자를 택했다. 생김새도 쓰는 말도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도 비슷해서 내가 소수자인 게 대번에 눈에 띄지는 않는 곳. 마음 같아선 지구 반대편의 신선한 풍경과 문화를 잔뜩 흡수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나날이 긴장하는 것보단 조금이나마 더 편히 지내고 싶었다. 그런 내게 출국 직전에 출간된 『작가 피정』2023(노시내 저, 마티)은 여행 내내 조곤조곤 대화할 수 있는 동반자로 삼기 충분했다.

책의 저자 노시내는 번역가이자 작가다. 한국계 미국 작가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의 자전적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2021를 비롯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2017(존 후퍼John Hooper 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2016(앤드류 포터Andrew Potter 저),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2019(아녜스 푸아리에Agnes Poirier 저) 등 책을 옮겼고 『스위스 방명록』2015과 『빈을 소개합니다』2013를 썼다. 이 모든 작업은 한국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저자는 26년 넘게 생의 절반을 타국에서 보내고 있으며, 현재는 여섯 번째 나라인 파키스탄에서 열 번째 도시인 이슬라마바드에 거주하고 있다. 『작가 피정』도 편도 수술과 회복을 위해 파키스탄 직전에 살았던 스위스에서 40일간 나 홀로 생활하며 써 내려간 글인데, 40일짜리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지난 26년의 시공간과 감각이 담겨 있다. 미국·일본·파키스탄·러시아·스위스· 한국이라는 곳과 강산이 세 번째 변하려는 시간, 그 시간을 경계인이자 소수자로 살아온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 말이다. 책에 관해 두괄식으로 거칠게 소개하자면 마이너 필링스를 경험한 소수자들의 성토장이 아니다. 저자는 지난 시간을 켜켜이 들추다가도 철저히 현재에 발 딛고서 이내 고개를 들어 미래를 본다. 자신이 살았던 나라와 만났던 민족의 역사부터 음식, 정치, 사회, 문화, 환경까지 경계인과 소수자라는 두 레이더로 꼼꼼하게 짚으며 나아간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흥미롭게 좇을 수 있었던 건 저자가 내게 ‘구체적인 얼굴들’을 소개해주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현재 사는 나라의 국민들을 파키스탄인이라고 뭉뚱그리지 않고 연보라색 토끼 인형을 사는 것에서 시작해 그 인형을 받는 남편의 동료 우마르 집에 초대받아 음식을 나눴던 시간을 들려주고, 러시아인에 대해서도 반푸틴 성향의 국민도 많다는 정도의 설명에 그치는 대신 과자집 앞줄에 서서 자신들에게 불쑥 과자를 건네던 러시아 아저씨를 비롯해 소박하고 잔정 있는 러시아인들의 얼굴을 하나씩 불러낸다.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마음과는 또 별개로, 이번 침공으로 러시아 정권만이 아니라 자칫 러시아 사람들 전체가 악한 마음으로 비칠까 봐 마음 아파한 저자의 진심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한국을 떠나 가장 오래 살았던 미국에 대해서는 옛정에 흐물거리지 않고 서늘하고 예리하게 꼬집기도 한다. 저자는 알고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연결된 얼굴을 알게 되면 그를, 그가 속한 사회를 쉽게 납작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걸.

나도 구체적인 얼굴들을 만나러 일본에 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일본인’이라고 여겼던 내게도 친구가 생긴 것이다. 마주 보는 눈동자가 생기고 서로의 언어를 절반씩 섞어가며 대화하는 입이 생기고, 보고 싶다며 메시지를 건네는 손이 생겼다. 한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서울에 와서 서대문형무소에 들르는 걸음을 직접 보았다. 경계 위를 조심히, 성실히 걸어 일본 사회로 진입한 나의 한국 친구도 이곳에 있다. 이 얼굴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치는 얼굴들도 매일 새롭게 생겨난다. 편의점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 아이 둘을 안고서 지하철에 타는 엄마 아빠, 목발을 짚고 공원에 산책 나온 이, 신주쿠역 근처 굴다리의 노숙자, 곱게 차려입고 모닝커피를 마시는 어르신, 케이크 집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앳된 얼굴의 학생… 아는 얼굴이 생기면 그를 둘러싼 상황에도 관심이 생긴다. 그 사람이 안전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먹는 음식, 숨 쉬는 공기, 그의 삶을 지탱해줄 법안, 매일 살아갈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히 궁금해지고, 가능하다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진다.

3년 만에 온 도쿄는 바뀐 것이 많았지만 나의 신분은 여전하다. 다른 언어를 쓰는 젊은 한국 여성이라는 소수자.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단어의 가짓수에 따라, 나이와 생김새에 따라 나는 한국에서보다도 더 약자로 분류된다. 이만큼 안전한 도시가 드물다는 것도 알고 여행자가 받을 수 있는 호의를 충분히 받으며 지내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평소에 당연히 누리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내가 대단히 뭔가를 잘 깨닫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곰곰 짚어보면 누구나 한번은 있을 것이다. 내 자리가 불시에 소수자 위치로 전환되던 순간이.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화, 신체, 정치적으로든 간에 말이다.

그런 느낌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면, 황정은의 『일기』2021 속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133~134쪽)

여행길이 속속들이 시원하게 열리고 있다. 수년간 삶의 터전에 발 딱 붙이고 사느라 애쓴 나를 먹이고 마시고 놀게 하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더 즐겁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까닭은 분명 이 책이 있어서다. 책에서 만난 얼굴들이 있고, 책이 가리키는 새로운 얼굴들이 있다. 나는 그 얼굴을 잘 기억하고 싶어서 오래 바라본다. 길게 떠나와서야, 절대 섞일 수 없는 곳에 와서야 말이다. 부디 이 감각이 서울에 돌아가서도 유지되길 바라는 한편, 노시내 번역가가 힘껏 공명하며 번역했을 책들이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에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그걸 다 읽고 난 내게 서울은 또 어떤 도시로 다가올까.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글 작가 손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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