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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둥근 달 아래 다시 모여
송파다리밟기

지난 2월, 서울의 몇몇 자치구에서 대보름맞이 축제를 열었다. 코로나19로 주춤했던 지역 축제가 재개된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교각에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노원구에서는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등 체험 행사와 더불어 귀밝이술 마시기, 보름떡 먹기 등 먹거리를 제공했고, 한복을 입고 오는 구민에게 부럼 세트를 증정하기도 했다. 다음 날에는 노원천문우주과학관 앞에서 정월대보름 공개 관측회를 열고 크고 밝은 달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보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도봉구에서는 길놀이로 문을 열고 지역 예술인과 함께하는 축하 공연, 축원문 낭독하기 등 행사를 진행했고, 서초구에서는 양재천 하부에서 소원지를 대형 달집에 매달아 태우는 달집태우기를 진행했다. 그리고 송파구에서도 송파다리밟기(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지정)와 더불어 길놀이, 달집태우기 등 한마당이 벌어졌다. 송파구에서는 매년 1,500여 명의 주민이 함께하던 민속놀이가 3년 만에 부활해 의미가 남달랐다.

대보름이면 열리는 민속놀이에 대한 기록은 고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실학자 이수광李?光이 지은 『지봉유설』에 의하면 “정월대보름에 다리 밟는 풍습은 전조(고려)로부터 시작됐으며 태평 시에는 매우 성하여 남녀가 줄을 이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으므로 거리가 혼잡하게 돼 이날 여자들의 다리밟기를 금지하기까지 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 때는 나라에서 사흘간 휴가를 줄 정도로 손꼽는 큰 명절이었다고 하니 대보름 다리밟기가 얼마나 성행했던 것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처럼 달 밝은 밤에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주술적 의미가 있다. 대보름 다리밟기를 하면 다리에 병을 예방할 수 있고, 열두 다리를 밟으면 일 년 열두 달의 액을 막고 건강할 것으로 믿었다. 또한 놀이패와 함께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대보름이 뜨는 밤이면 거리로 나와 다리를 밟고 놀이를 즐겼다. 심지어 왕조차도 다리밟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을 정도였다. 영조가 노쇠해 다리밟기를 하지 못한 것이 개탄스럽다고 남긴 시가 『어제완월답교御製翫月踏橋』에 잘 드러나 있다. 또한 『동국세시기』에는 “장안의 남녀가 저녁 종소리를 들으려고 열운가閱雲街의 종각으로 몰려든다. 종소리를 들은 후 흩어져 여러 곳의 다리로 가서 산책하는데 밤새워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은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야단법석이었다”고 적고 있어, 대보름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명맥을 이어온 다리밟기는 각 지역의 민속과 융합해 다양한 형식의 지역 축제로 자리잡았다. 서울의 다리밟기는 광통교·수표교·염천교와 같이 청계천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성행했고, 풍납·몽촌·송파 등지에선 행해지던 다리밟기에는 전문 놀이패가 합류하면서 유희적 성격이 점차 강화됐다. 특히 송파다리밟기의 경우 노래와 춤이 포함된 종합 연희의 장으로 발전했다. 세시풍속의 하나였던 다리밟기가 주술적 역할에 그치지 않고, 무동놀이 선소리와 집사·별감·양반 등 배역이 등장하는 민속춤이 더해져 축제의 장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본래 송파에는 다리가 없어 나무로 가교를 만들고 그 다리를 건너다니다 공터에서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선소리(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하며 놀았다. ‘길놀이-마당춤놀이-다리밟기-선소리-뒷풀이’ 순으로 판이 벌어졌는데, 산대놀이의 탈꾼이 상당수 참여하면서 예능적 측면이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 송파산대놀이(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의 자라춤사위와 한삼사위춤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뒷풀이에서는 길군악을 울리며 길놀이를 하는데, 모닥불 주변을 돌며 멍석말이와 진풀이 춤 등을 추고 모닥불에 집안에서 쓰던 낡은 빗자루와 연 등을 태워 액막이했다. 즉, 송파다리밟기는 전문 놀이패가 함께하는 축제이자 대동적 역할을 하는 장이었던 것이다.

현재 전국의 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서 행하고 있는 송파다리밟기는 ‘길놀이-마당춤 놀이-선소리-뒷풀이’ 순으로 판이 벌어지는데, 무대화되는 과정에서 실제 다리를 건너지 않게 됐기 때문에 다리밟기가 빠진 것이다. 민속예술의 무대화와 대형화로 인한 문제 제기가 있지만, 이를 통해 옛 소리와 춤이 명맥을 잇게 됐다는 점과 이를 계기로 많은 민속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라 평가받는다. 송파산대놀이 역시 1969년 제10회, 1986년 제2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각각 문화공보부장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수상했고, 석촌동 서울놀이마당에서 송파민속보존회 주최로 이충선·한유성· 문육지 등 예능보유자들이 재현한 것(1985년 3월)을 계기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머리 위로 떠오른 둥근 달을 바라보며 한 해 액을 막고 건강과 평안을 기원하던 달맞이 축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단순한 지역 축제의 부활에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멀어졌던 사람 간의 거리를 좁히고 마음의 빗장을 푼 채 서로를 위한 축원과 덕담을 전하는 공식적이고 자발적인 판이 재개된 것이다. 본래 마을 축제란 것이 그렇듯 주술적·연희적 판을 즐기고 서로 소통하며 친교를 맺는 자리가 사회를 다시금 하나로 이어주길 기원해본다.

글 칼럼니스트 김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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