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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소박하고 사소한 시작

웹진 [비유] 55호 포스터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상처를 주고도 모르는 일은 더더욱 없었으면 한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도,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닌 탓에 이런저런 곤란을 겪어왔고 그래서 혼자 품게 된 생각이다. 매사 상황을 차분하게 파악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이런 의향을 성품이 따라주지 못하니 모든 관계가 피로하게 느껴지는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의 불안을 달래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책에 빠지는 것이다. 쉽게 추측하기도 어렵고 섣불리 공감해서도 안 될 것 같은 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그렇게 새롭게 들여다보게 된 세계를 통해 나의 가치관을 조금씩 수정해 나간다. 남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지 몰라 스스로 의심하거나 여과 없이 툭 뱉어버린 말이 관계의 독이 돼버리는 일을 피하려면 꾸준히 배워서 좀 더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지구가 삐뚤어지지 않았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없었다잖아
삐뚤어진 게 정상이고 반듯한 게 비정상일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바람이 저렇게 불어 나무를 삐뚤어지게 하는지도 모르잖아
박은경 〈삐뚤어진 눈썹〉 중

박은경의 동시는 외모에 대한 어린 ‘나’의 관심에서 시작해 그 나이의 화자가 성장기에 느낄 법한 반항심에 관한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옮겨간다. 작품 속 어린 화자는 왠지 삐뚤어지게 행동하고 싶은 사춘기의 심정을 비정상적인 무엇으로 비난하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낀다. ‘나’는 자전하는 지구와 바람으로 인해 기울어 있는 나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 등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하는 세계를 지탱하는 어떤 기울어진 상태가 존재함을, 그러한 비뚤어짐 덕에 우리가 누리게 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허다한지를 이야기한다. 이 발견은 곧 ‘나’ 자신의 삐뚤어진 외모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얼핏 소박해 보이는 저 자기 긍정이야말로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윤리적 태도를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소영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죄송해요’, ‘미안해’를 입에 달고 다녀야 했다. 휠체어에 견주면 다니기 편하다는 유아차형 휠체어를 타고 가기에도 우리 아파트에서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가는 길은 너무 불편했다. 처음에는 얼마 전 알게 된 지름길로 가려고 했다가 아파트 쪽문을 지나가려면 계단 3개를 올라가야 한다는 걸 알고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평소에는 인도와 차도 사이의 턱 따위를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도로의 턱 때문에 연수가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공진하 〈운동화 한 짝〉 중

위 작품은 은지와 소영이 은지네 아파트 엘리베이터 바닥에서 자주 발견되는 실내화 한 짝의 주인을 찾아 나서는 데에서 시작한다. ‘김연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그 실내화에 관한 사연은 이렇다. 실내화의 주인은 은지와 소영과 동갑이면서도 그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친구다.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연수가 학교버스로 통학해도 30분 넘게 걸리는 특수학교에 입학해야만 하는 사정을 통해, 더 사소하게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 장면을 통해, 공진하 작가는 비장애인에게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불편한’ 세계를 그린다. 그렇게 사소한 ‘운동화 한 짝’을 통해 몸이 불편한 자들의 세계 혹은 비장애인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세계가 도처에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흔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너기가 불가능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심연 너머 타자를 향해 끝없이 말을 걸고 손을 내민다. 그러한 윤리적 태도를 고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진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보기 드문 윤리성이 소박한 자기 긍정과 사소한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진실일 것이다.

김잔디_[비유]편집자 | 사진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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