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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박봉술과 한승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암성暗聲과 아귀성

우리는 조선성악연구회를 알아야 한다. 그곳을 알아야 민속음악의 뿌리를 알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 조선성악연구회 한옥은 지금도 남아 있다. 국악로의 큰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있는데 한쪽은 현재 고깃집으로 영업한다. 남아 있는 조선성악연구회 회관을 복원하지 못하면 이곳을 국악로라고 부르는 것에 자괴감이 들 것이다.

꼬리를 달지 않은 소리

이곳이 조선성악연구회 회관이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 한승호 명창이다. 한승호 명창은 조선성악연구회 회관이 매우 중요한 장소임을 강조했다. 조선성악연구회에 일찍이 10대 소년의 나이에 들어가 대명창에게 학습한 명창으로는 박봉술(1922~1989)과 한승호(1924~2010)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송만갑 명창 문하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돌아가신 형님의 뒤를 이어 박봉술은 소리를 시작했다. 그는 송만갑 명창에게 소리를 배운 기간을 ‘소리의 때를 벗긴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소리에 꼬리를 달지 않고’ 꿋꿋하고 거뜬하게 소리를 밀고 가는 힘을 배웠다.
1938년 4월 28일, ‘심청전 전창대회全唱大會’가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열렸다. 판소리 <심청가>를 여러 명창이 나눠 불렀다. 맨 처음 무대에 올라와 오프닝 무대를 장식한 사람은 소년 명창 한승호다. 1939년 5월 13일, ‘조선소리콩쿨’이 역시 부민관에서 열렸다. 요즘 말로 하면 ‘차세대 명창전’이다. 앞으로 조선악朝鮮樂을 책임질 신진의 무대였다. 박봉술이 <춘향가>를 불렀다.
두 사람은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열사가>를 만든 박동실(1897~1968)의 제자답게 한승호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연관된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아쉽게도 당시의 전통예술인은 친일과 관련해서는 자유롭지 못했는데 두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한승호는 징용에 가기 싫어 숨어 다녔고 박봉술은 낙향해 장가를 들었다.
1960년대에도 두 사람은 주목받지 못했다. 두 사람의 소리 스타일이 대중에게 가닿지 못했다. 대중은 소리에 꼬리를 달아가면서 기교를 부리는 화려한 소리를 좋아했다. 당시는 국극과 창극의 전성시대였다. 대중은 연극적인 소리를 좋아했는데 두 사람의 소리는 성음보다 발음을 중시하는 소리였고, 대사든 노래든 전달력에 중점을 뒀다. 두 명창이 유독 창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71년 7월 5일, ‘제1회 판소리유파발표회’가 명동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당대 최고 명창이 출연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고제古制의 질박한 소리를 다시 알아주기 시작한다. 박봉술과 한승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은 완창 판소리를 하면서 공력을 인정받는다.

박봉술

한승호

들리지 않는 고음’과 ‘각구녁질’

1974년 4월 2일, ‘제1회 한승호 판소리 독창회’가 열렸다. 한승호는 특히 <심청가>와 <적벽가>에 집중했다. 1976년이 한승호의 해라면, 1977년은 박봉술의 해였다. 1976년 3월 23일, 한승호는 <심청가>를 불렀고, 1976년 7월 2일과 9일, 2주에 나눠 <적벽가>를 불렀다. 1977년 1월 21일, 박봉술은 <수궁가>를 시작으로 11월 25일 <심청가>를 불렀다. 박봉술의 완창 무대에는 옛 유성기 음반과 조선성악연구회의 소리를 알고 있는 귀명창이 운집했다.
두 사람의 소리는 매우 달랐으나 사람들 모두 두 명창의 소리를 사랑했다. 박봉술은 꽉 잠겨 있는 듯한 탁한 성음이라 처음에는 듣기에 거슬릴지 모르나 박봉술 소리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이처럼 구수한 소리가 없다. 박봉술은 고음이 잘 나지 않았으나 귀명창들은 ‘들리지 않는 고음’을 들었다. 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듯하지만 어떤 때는 가늘게 올라오는 소리가 있었다. 암성暗聲이라고 하는 가성歌聲인데, 이 또한 박봉술 명창의 소리를 이야기기할 때 거론해야 한다. 박봉술 명창이 이렇게 상청에 이르게 되면 청중은 더욱더 신명이 났다.
한승호는 늘 쨍쨍한 소리를 냈다. 한승호의 소리를 ‘아귀성’이라 한다. 목청을 좌우로 젖혀가면서 힘차게 내는 소리를 말한다. 한승호 소리 특유의 매력이었다. 또한 ‘각구녁질’이라고 하는데 여러 구멍(구녁)을 모두 열어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판소리의 여러 조를 두루 넘나드는 것을 말한다. 우조-평계면조-우조-평조-단계면조-진계면조-우조 등 다양한 조성調性으로 옮겨 다니면서 그 조에 맞는 음색을 제대로 구색하는 것을 말한다.
타계 시기는 다르나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모두 서울 성북구에서 말년을 보냈다. 1989년 12월 11일, 박봉술 명창은 서울 성북구 장위2동 225의 117번지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2010년 1월 28일, 한승호 명창은 생의 마지막 시절을 성북구 정릉2동 다세대주택에서 지냈다. 두 사람에게는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평생 수완이란 것을 하나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삶에는 오직 판소리의 성음만이 존재했다.

윤중강_국악 평론가 | 사진 제공 윤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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