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ASSOCIATED

6월호

사진작가 라미 현잊지 않겠습니다
라미 현 작가는 2013년 육군 1사단 장병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지금까지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1,400명이 넘는 6·25전쟁 참전용사를 사진에 담았다. 더 늦지 않도록, 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장 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삶을 증명해 수년의 세월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모습은 현재를 누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앞으로도 계속 6·25전쟁 참전용사의 모습을 기록할 라미 현 사진작가와 전화로 대화를 나눴다.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자신 나름의 신념을 갖고 국방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한국전 참전용사 베레이 베겔레 ⓒ라미현

신문사 국제부에서 일하는 필자는 늘 외신을 접한다. 얼마 전 멕시코에서 1주일 간격으로 날아든 두 건의 소식이 감동과 비통을 차례로 안겼다. 4월 24일 멕시코시티에서 한국 대사관 주도로 한국전쟁 참전용사회가 출범했다. 멕시코는 6·25전쟁 당시 한국을 돕고자 전투 병력이나 의료진을 보낸 ‘참전 22개국’의 일원은 아니다. 하지만 약 10만 명의 멕시코 국적 젊은이가 미군 소속으로 6·25전쟁에서 싸웠다고 한다.
1930년생인 호세 비야레알 비야레알 옹도 멕시코인 6·25전쟁 참전용사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참전용사회 결성의 대의에 공감해 몸소 초대 회장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한국 대사관에서 열린 용사회 결성식에 비야레알 옹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모습이 담긴 사진은 필자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꼭 1주일 뒤인 5월 1일 그 비야레알 옹이 91세로 별세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참전용사회 결성식 기념사진이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됐다. 아픈 몸으로 끝까지 행사장을 지킨 그의 행위는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은 법”이란 말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것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고령의 6·25전쟁 참전용사가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시는 동안 서둘러 관련 기록을 남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사진작가 라미 현(한국 이름 현효제)은 2016년부터 국내외 6·25전쟁 참전용사 사진을 촬영하는 일명 ‘프로젝트 솔저’를 진행하고 있다. 고령의 외국 참전용사를 한국으로 모시는 게 힘들다 보니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까진 주로 그가 직접 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 현 작가가 인물 사진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 참전용사만 13개국 1,400여 명에 이른다. 놀라운 건 촬영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성껏 인화한 사진을 깔끔한 액자로 만들어 주인한테 전달한다.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 출연을 계기로 이런 그의 활약상이 널리 알려지며 국가보훈처에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마침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부산에선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참전용사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유엔평화기념관 전시회는 10월 29일까지, 롯데백화점 광복점 전시회는 6월 26일까지다. 6·25전쟁 참전용사와 부산,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전란기간인 1950~1953년 외국 참전용사는 거의 다 부산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다. 그 시기 부산은 서방 국가들이 보기엔 작고 약한 신생 공화국에 불과한 한국의 임시 수도 노릇도 제법오래했다. 현 작가도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외국인한테 한국의 첫 관문이었죠. 전시회가 열리는 유엔평화기념관은 참전용사 묘지가 있는 유엔기념공원 옆에 있습니다. 과거 6·25전쟁 때의 사진과 유물 등을 보관한 곳인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 참전용사들의 옛 모습과 70여 년이 지난 현재 모습이 공존하게 된 거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주로 패션 광고 사진을 찍어온 그는 어떻게 6·25전쟁 참전용사 촬영에 뛰어들었을까. 참전용사 이전에 먼저 평범한 군인들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2013년 우연한 기회에 육군 1사단 홍보물 제작에 참여한 그는 장병들의 일상을 접하고 크게 놀랐다. 본인도 2001~2003년 군복무를 한 예비역 육군 병장이지만 ‘후방’으로 분류되는 대전의 부대에 있었던 그에게 일반전초GOP 근무 등 최전방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말 그대로 ‘군대 두 번 간 듯한’ 느낌이 들었을 게다.
“어느 원사 분은 1,000일 중 200일 빼고는 집에 못 들어갔다고 하시더군요. 군인을 떠나 한 가장으로서 가족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시더니 전역 후 가족끼리 여행 한번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어요.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분들을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사진을 찍어드리기로 한 거죠. 자신 나름의 신념을 갖고 국방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현 작가는 1999년 가을 공군에 입대해 2003년 초까지 40개월 동안 복무한 필자와 군대에서 생활한 기간이 상당히 겹친다. 뭐라고 할까, 비록 표현하진 않았으나 ‘전우애’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필자보다 우리 군에 대해 훨씬 더많이 알고 있었다. “유니폼(제복) 입고 돌아가신 분들에게 민주당이 너무 소홀히 한다”는 집권 여당 최고위 정치인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현 작가가 내놓은 대답이다. “군 부대의 시설이나 복무 여건이 너무 열악해요. 어느 군인은 아내가 애를 낳는데 마침 본인의 훈련과 출산 일정이 겹쳐 부인이 입원 중인 산부인과에 못 갔답니다. 할 수 없이 훈련 도중 휴대폰으로 ‘미안하다’고 전화를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훈련 기간에 왜 외부와 통화했느냐고…. 나중에 그 아내 되시는 분이 부대장한테 울면서 ‘우리 남편 너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지휘관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하던데요. 제가 만난 군인들은 ‘왜 군인이 됐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자부심·자존심 같은 얘기를 하죠. 적어도 그분들이 입대할 때 느낀 그 자부심·자존심을 계속 지켜갈수 있도록 국가에서 최소한의 배려라도 했으면 합니다.”

액자 값은 00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이렇게 국군, 그리고 주한미군 장병들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 자연스럽게 6·25전쟁 참전용사 촬영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그의 카메라 앞에 ‘모델’로 선 현역 군인만 4,000명쯤 된다. 여기에 6·25전쟁 참전용사까지 더하면 5,400명이 훌쩍 넘는다. 촬영은 그렇다 쳐도 인화한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주인한테 전달하는 것은 각별한 정성과 더불어 상당한 비용이 드는 작업이다. ‘프로젝트 솔저’가 영리활동도 아니고 대체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는지 궁금했다.
“한국에서 상업적 목적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다가 2019년 정리했어요. 요즘은 6·25전쟁 참전용사 사진 촬영에만 전념하고있죠. 돈이요?(웃음) 가끔 학교에서 6·25전쟁 참전용사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뜻있는 분들한테 후원도 받고 있습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출연 효과가 제법 컸어요. 언뜻 6·25전쟁에 별로 관심 없을 것 같은 젊은 층의 반응이 특히 좋았죠. 여성 분들의 호응이 늘어난 것도 큰 수확이에요. 전에는 후원자 비율이 거의 9대 1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방송 출연 후 남성 6 여성 4 정도로 여성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사실 현 작가는 액자를 직접 전달하러 해외 참전용사 집을 방문했을 때 “혹시 돈이 목적이냐”는 오해 섞인 말을 듣고 놀란 적도 있다고 한다. 다소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미리 준비한 모범답안처럼 내놓는 문구가 있다. “액자 값은 ○○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는 말이다. 무료임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6·25전쟁 70주기인 지난해에는 “70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다”고 했다. 올해는 ‘71년’이다. 실제로 그는 올해 5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액자 값은 71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라는 제목의 행사를 진행했다. 대전·충남 지역에 거주하는 6·25 전쟁 참전용사 10명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한 뒤 특히 사진은 현장에서 액자로 만들어 모든 용사에게 증정했다.
사진작가로서 그는 한 사람만을 피사체로 삼을 때 오직 인물의 눈동자에 집중한다. 마치 인터뷰를 하듯 그 사람의 영혼, 솔직한 내면을 끌어내는 게 목표다. 미국 사진작가 리처드 애버던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요즘 같은 총천연색의 시대에 현 작가가 굳이 흑백사진을 고집하는 것도 애버던을 향한 존경의 표시다. 개인 사진과 달리 단체 사진은 인물 못지않게 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중요하다. 주인공과 배경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야한다는 뜻이다. 등장인물 전원이 누구도 튀지 않으면서 또 각자 개성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도 핵심이다. 단체 사진의 경우 미국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의 기법을 주로 참고한다고 했다. 레보비츠는 연예 뉴스와 패션 정보를 전하는 잡지 《베니티 페어》 2004년 3월호에 할리우드 인기 여배우 13명의 단체 사진을 실어 화제가 됐다. 귀네스팰트로·나오미 와츠·셀마 하이에크·커스틴 던스트 등 한명 한명이 최고 스타인 이들을 무리없이 한 컷의 사진 안에 담아내는 거장다운 관록을 선보였다.
주한 미국 대사관도 현 작가에게 주목하고 있다. 한·미 두 나라는 6·25전쟁을 거치며 혈맹으로 맺어졌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6·25전쟁에서 숨진 미군 장병 3만 6,574명의 이름을 새긴 전사자 명비가 있는 이유다. 미 대사관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현 작가의 전시회를 소개했다. 대사관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6·25전쟁 참전용사 1,400여 명을 사진에 담고, 계속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사진작가의 이야기에 마음이 훈훈해진다”며 찬사를 보냈다. 부산 주재 미국 영사관의 고든 처치 영사는 직접 행사장을 찾아 현 작가를 격려했다. 마침 처치 영사 본인이 외교관으로 전업하기 전 육군 장교로 일한 군 출신 인사다. 지금도 테네시주 명예 대령의 직함을 갖고 있다. 미군 및 한국군에 커다란 애정을 품고 있는 처치 영사의 응원은 현 작가한테 커다란 힘이 됐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더 열심히,
더 많은 분을 찾아갈 작정입니다.

미국 자치령 푸에르토리코 65보병연대 한국전 참전용사 ⓒ라미현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현 작가가 언론 인터뷰 때마다 빼놓지 않고 꼭 거론하는 6·25전쟁 참전용사가 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촬영한 윌리엄웨버 예비역 육군 대령이다. 그는 1951년 강원도 원주에서 전투 도중 오른팔,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솔직히 전에 이름도 한 번 못 들어본 ‘코리아’라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노병 앞에서 한국인이라면 얼마나 미안했겠는가. 하지만 웨버 대령은 싸움터였던 한국도, 조국인 미국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했다. 몹시 송구스러워하는 현 작가를 향해 “한국은 나에게 빚진 게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직 자유를 얻지 못한 북한을 거론하며 “이제 당신들(한국인)의 의무는 북녘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웨버 대령님처럼 외국 참전용사들은 ‘자유’를 참 많이 말씀하세요. 미국의 경우 6·25전쟁에서 싸운 분 상당수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죠. 그분들은 조국의 자유를 지키고 또 자유를 빼앗긴 다른 나라 국민들한테 자유를 되찾아 줬다는 자부심이 아주 커요. 한국의 참전용사들은 조금 달라요. 그분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나라 없는 설움을 뼛속까지 느꼈어요.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또 나라를 빼앗긴다’ 하는 절박함 하나로 싸웠습니다. 자유보다도 생존 그 자체가 유일한 목표였던 거죠. 전후에는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하는 데 남은 인생을 다 바치신 분들입니다. 한국을 구한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만드는데 기여하면서 무척 고생하셨죠. 그래서인지 해외 참전용사들한테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떤 한이 서린 정서도 느껴져요.”
현재 생존해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는 국내에 8만여 명, 해외에 11만 명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수년간 현 작가가 열심히 뛰어 기록을 남겼지만 아직 1,400여 명 촬영에 머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더 열심히, 더 많은 분을 찾아갈 작정”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참전용사들의 부탁은 그저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것뿐이에요. 자라나는 세대가 한 명이라도 더 그분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현 작가와 인터뷰를 마치고 이 글 서두에 소개한 멕시코 참전용사 비야레알 옹을 다시 떠올렸다. 멕시코시티 한국 대사관의 무관이 부음을 듣고 고인의 자택을 찾아갔을 때 유족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기억해 준 대한민국에 고마워하고 행복해했다”며 감사를 전했다고 한다. 고인의 관 위에는 70년 전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이가 한반도에서 입었던 군복이 단정하게 개켜진 채 놓여 있었다. 스페인어로 ‘COREA’가 새겨진 검은색 참전군인 모자와 더불어 생전 한국 정부에서 선물로 받은 고운 빛깔 목도리도 고인 곁을 지켰다. 한글 글씨가 수놓아진 목도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태훈 《세계일보》국제부장 | 사진 공간느루 | 사진 제공 라미 현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