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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21980년대의 마지막 경험, 유치장

마포 유치장에서(왼쪽부터 유시춘, 이경자, 윤정모)

나는 그날까지 경찰서는 물론 그곳의 유치장이라는 곳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열패감도 있었다. 연이은 군부독재 정권 시절, 집시법 위반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가서 신문에 얼굴이 나오고 또 서빙고나 남산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한 경험을 풀어놓는 선배나 동료 작가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던 때, 괜스레 마음에 괴어오르던 차가운 열등감과 후끈한 부러움을 지병처럼 가지고 있었다. 그땐 그렇게 사는 것이 당당한 삶으로 보였다. 그러니 나는 늘 당당하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갇혀 있었다. 다만, 그저 누가 도피하는 데 돈을 좀 내라고 하면 얼씨구나 좋아서 분수를 잊곤 한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이런 나에게 한국작가회의는 거의 정신신경증 치료소 같았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석방을 위한 철야 농성을 한다고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으면 순식간에 마음이 우쭐해졌다.
내면에 이런 울퉁불퉁한 무의식과 의식의 응어리와 갈피들을 가진 나. 드디어 소원 성취의 행운을 얻는 일이 생겼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난 1989년 3월이었다. 작가회의는 2월 17일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로부터 지난해 제안한 ‘남북작가회담’에 동의한다는 공개서한을, 통일원을 통해 전달받았다. “…작가들은 시대와 민족의 선각자이며 선도자입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는 편지였다. 바로 다음 날 정례이사회에서 고은 시인을 남북작가회담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3월 4일,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에 3월 27일 혹은 그 직후에 예비 회담을 열 것을 제안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3월 16일, 조선작가동맹은 그날 오전 10시에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각기 대표 5명으로 예비접촉을 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사이, 그러니까 3월 20일 황석영 소설가가 북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했고, 3월 25일에는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다.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여론이 싸늘했다. 정국은 공안 통치로 치닫고 있었다. 분단 이후 처음인 남북작가회담은 가장 나쁜 시기에 열리는 셈이 됐다. 이날 오전 10시, 남쪽 대표단 5명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회원 30명과 전세버스에 올랐다. 그 30명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버스는 끝내 판문점까지 가지 못했다. 파주 운천리의 여우고개에서 미리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던 경찰과 전경에 의해 저지됐다. 버스는 서울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공권력이라는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것에 저항한다는 낮은 단계의 공명심을 함께 느꼈을 것 같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익숙한 거리로 들어서서 마포경찰서 마당에 멈추었다. 그때 내 눈에는 우리가 모두 패배의 옷을 입은 승리자로 보였다. 하지만 난생처음 닭장차를 타고 경찰서 마당에 부려진 나는 솔직히 정신이 혼미했다. 선생님들과 동료 후배들이 30명이나 됐지만 공포심은 내 안에 있었다. 곧 누군가가 우리를 유치장으로 몰았다. 지하였던 것 같은 그곳. 시멘트 계단 아래는 볕이 들지 않아 음산했다. 마치 봄기운을 피해 구석으로 몰려가 있는 겨울의 누추한 독기가 느껴졌다.
맨 앞장에 서서 남이 보면 거의 씩씩했을 터. 그러나 겁이 나서 매를 먼저 맞으려는 마음뿐이었다. 여기저기서 기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비어 있는 커다란 빈방으로 잽싸게 들어가 구석에 앉았다. 그런데 곧, 경찰이었던가? 내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누나, 여긴 남자 방이야!” 후배가 큰소리로 말했다. 유치장에도 남자 방 여자 방이 따로 있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비어 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크기가 작았고 여자는 셋이었다. 윤정모, 유시춘, 나. 모두 소설가였고 두 살씩 나이가 터울 졌다.
3월 하순의 유치장은 추웠다. 쫓기는 겨울이 다 그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고 잠을 잤다. 여기저기서 방문했고 먹고 마실 것도 가져다줬다. 나는 발이 시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양말을 부탁했다. 깔끔한 윤정모와 유시춘은 발을 잘 씻고 와서 새 양말을 갈아 신었다. 하지만 게으른 나는 잘 씻지 않았고 신고 있던 양말 위에 그냥 덧신었다.
낮에는 경찰서에서 조서도 썼다. 하룻밤을 자고 나자 집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났다. 영문 모를 아이들이 걱정됐다. 우리가 유치된 방 앞에는 경찰이 보초를 섰다.
자료를 보니 우리는 유치장 구금 54시간 만인 3월 29일 오후 5시경에 훈방 조치됐다고 한다. 그날 풀려난 나는 마포에서 광화문을 거쳐 종로까지 하염없는 기분으로 걸었다. 1970년대 유신 정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지하 시인이 출소한 뒤에 “하염없이 걸었다”는 말을 먼발치에서 들었는데 그날 걸으면서 사형수 김지하 시인의 마음을 생각해 본 기억이 난다. 집에 왔을 때 어린 두 딸이 무척 반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뉴스에서 닭장차를 탄 엄마를 보았다고 했다. 가정이란 집의 편안함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어떤 정체감이 풀린 기분을 느꼈다. 반공법 범법자를 안다거나 수배 중인 데모 주동자를 감춰줬다거나 하면서 늘 아슬아슬했던 경계, 그러니까 기회주의적 태도에 대한 자괴감이 씻긴 기분이었다.
이 시대의 푸르고 맑고 따뜻했던 문인들, 우리 곁을 많이 떠났다. 그해 4월 27일 밤, ‘민족의 문학 통일의 문학’을 강연했던 김남주 시인. 우주 어딘가에서 채광석·조태일·고정희 등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 부를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세상에 유일한 분단국가 국민이 된 날, 그리고 내 삶의 1980년대도 끝났다.

글·사진 제공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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