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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판소리 햄릿-송보라 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도 아니지

3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우소극장에서 공연한 <판소리 햄릿-송보라 편>

연극을 보러 나선 날,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 대학로의 여러 극장은 어둠 속에 외롭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판소리 햄릿-송보라 편>은 그러한 시점에 불을 켜고 관객을 맞이한, 몇 안되는 공연 중 하나였다. 극장가 전반에 찾아든 유례 없는 고요함, 마스크를 쓰고 눈동자와 눈동자를 마주치며 모여 앉은 관객들, 연우소극장에 강하게 퍼지는 소독제 내음 속에서, ‘이 시대에 공연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햄릿은 외롭지 않다

공연의 부제처럼, 이 공연은 ‘햄릿의, 햄릿에 의한, 햄릿을 위한’ 햄릿이다. 소리꾼 1인이 극을 전개하는 판소리의 특성을 살려 인물의 내면 심리를 뚜렷하게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소리꾼 송보라는 극을 관통하는 시선, 그러니까 햄릿의 시선과 입장을 일관성 있게 창조한다. 그는 관객을 이끌고, 타오르는 의심으로 새까매진 햄릿의 은밀하고 따가운 목구멍 속에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절절히 끊어지는 그의 창자 속까지, 말 그대로 휘젓고 다닌다. 극이 전개되면서, 관객과 햄릿은 마스크 한 장 비집고 낄 틈도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는데, 햄릿에게 마음을 활짝 연 관객들은 그의 선택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소리꾼은 거트루드·폴로니어스·클로디어스 등 주요 인물들을 넘나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햄릿의 내면을 선명하고 투명하게 펼쳐내는 것에 주력한다. 원전에서 그토록 비밀스럽던 햄릿의 의도들이 얼마나 시원스럽게 선택되고 표현되는지 가려운 곳이 긁혀 속이 다 시원할 정도다.
이 지점에서 송보라의 <판소리 햄릿-송보라 편>은 원전과 차별화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햄릿은 누구였던가? 5막까지 헛발질만 하는 자였다. 얼마나 징징대면서 질질 끄는지, 4막쯤 넘어갈 지점에는 ‘쟤 도대체 왜 저러니’ 하고 고개가 좌우로 저어질 만큼, 질리도록 수많은 독백, 도망, 망설임, 엄한 사람들의 죽음을 쏟아내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마침내’ 행위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송보라의 햄릿은 얼마나 당당하고 앙칼진가! “근데 말여, 사실 내가 뭐 꼭 왕이 되고 싶었던 건 아녀 긍게 내 인생의 목표가 왕은 아니었다는 거지.”라든지, “나는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오필리어한테 미안했다. 오빠가 그때는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랬지만 내 사랑은 너뿐이다 이래갖고 할라 그랬는디-”라든지. 송보라의 햄릿은 자기 마음을 잘 알고 있고, 그만큼 행위의 선택도 깔끔하다.
생각해 보니 셰익스피어 햄릿에게 없는 것이 송보라 햄릿에게는 있다. 바로 ‘고수’다. 그는 쓴소리를 하더라도 완벽히 햄릿의 편이다. 햄릿이 자신의 심리를 발견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그가 선택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낸다. 그렇다고 고수가 별다른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오직 소리꾼과 대화하는 것, 그것뿐이다. 대화가 있다면, 누군가와 얘기를 할 수만 있다면, 햄릿은 더는 우유부단한 미완성의 왕자가 아니다. 송보라가 표현한 햄릿은 자신의 전략과 심리를 잘 구성해 목표를 이루는 영웅이다. 영웅은 고수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

‘코로나 시대’의 햄릿

그렇게 막이 내렸다. 원전 햄릿의 우유부단함, 미숙함, 애매모호함이 표현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나? 물론 그렇다. 사실 언제나 햄릿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우유부단한 심장과 나의 심장이 닮아서일 것이다. 행동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확인이 필요했던 햄릿의 가여운 주저함을 늘 내 모습과 일치시켜 왔었다. 그렇기에 원전 햄릿에게 깊은 애정과 친밀함이 있었다. 그런데 소리꾼 송보라가 표현한 선명한 햄릿은 우유부단함 대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해 주었다. 그 무엇인가가 내 희미한 박동의 심장에 어떤 힘의 흔적을 남겼다.
하나둘 불이 꺼지는 극장 속에서, 소리꾼 송보라는 ‘내 옆에 입을 가진 누군가 있다는 것’, ‘대화할 수 있다는 것’ 단순히 그것만으로 햄릿이 원전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 막막함과 단절 속에서, 만남에 대한 불안감과 관계에 대한 초조한 감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오늘날의 어둠 속에서, 송보라의 햄릿은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질문을 던지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가 인간의 얼굴과 삶을 또렷하게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바로 판소리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글 안정민_극작가·연출가. 연극이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곳, 보이지 않던 세계를 보이게 하는 장소라고 믿고 있다.
현재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대표를 맡고 있다. <사랑연습-갈비뼈타령> <뜻밖해> <고독한 목욕> <이방인의 만찬-난민연습> 외 다수의 연극을 극작, 연출했다.
사진 제공 플레이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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