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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알았으면 하는 것 재난의 시기 동안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에 대하여
올 초부터 지속되고 있는 이 재난의 시기를 당신이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저런 상황에 휩쓸려가지 않고 하루하루 버틸 수 있게 하는 작고 소중한 것들이 있는지도.
나는 일상을 구성했던 빽빽한 것들 사이에 연약한 틈이 보이는 이 시기로 인해, 그 연약한 것들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 틈이 전부일지도 모르므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중

온 사회를 휩쓸어버리는 사회적인 재난이 도래하면, 가장 먼저 개개인의 삶이 지워진다. 원래 삶이란 저마다 소중히 여기거나 정성을 들이는 각기 다른 부분들로 세밀하게 하루하루 채워지는 것이고, 그런 디테일들이 삶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는 아침에 일어나 강가를 달리고, 누군가는 집에 돌아오는 길의 노천카페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고, 누군가는 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 산책을 사랑하며, 누군가는 매일 동네 꽃집에서 꽃 한 송이를 산다. 삶이란 그렇게 저마다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한 일상의 조각들, 사랑하는 세부들로 채워나가면서 이어지고, 그것이 각자의 삶이 되며, 그렇게 쌓인 삶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인 재난은 그 모든 차이를 없애버린 채, 사람들을 단 하나의 공동 운명 속에 통합해 버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매일 나섰던 공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균으로 언제 공격 받을지 모르는 위험한 장소가 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들르곤 했던 카페도 들어서기 조심스러워지고, 때때로 나의 저녁을 지켜주던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외식도 부담스러운 시간이 된다. 매일 정돈하며 단골손님을 맞이하던 매장도 공허한 장소가 되고, 유지되리라 믿은 매달의 수입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지출이나 할부금까지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올해의 시작과 함께 들이닥친 전 사회적인 재난, 병원균이 곳곳에 퍼지면서 극도로 불안해진 일상은 우리네 삶을 대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다. 다들 외출 빈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마치 양말이나 신발을 신듯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집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새로이 적응하는 모습이 전국 어디서나 비슷하게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안에서 해 먹는 요리의 종류나 즐기는 콘텐츠, 저마다 가지고 있는 걱정의 세세한 내용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동의 운명 앞에서 우리가 만들어오던 일상이란 한편으로는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유지되는 가족 간의 끈끈한 사랑이라든지, 멀리서도 계속 안부를 전하는 우정이라든지, 삶을 단단하게 유지해 주던 나의 일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조차 삶을 부드럽고도 잔잔하게, 반짝거리면서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연약한 조미료들’이 없다면 금방 무미건조하고 무겁기만 한 삶의 부담이 될지 모른다. 사랑에는 펜션이나 산책이 필요하고, 우정에는 맥주와 호탕한 웃음이 있어야 하고, 일에도 때로는 커피와 함께하는 공간이나 동료와의 즐거운 시간이 있는 게 역시 더 좋은 것이라고, 그리고 어찌 보면 부수적이라 여겨지는 그런 측면이야말로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시간

에세이집 《이것이 인간인가(Se questo un uomo)》는 전 세계적인 재난이자 개인으로서는 더한 절망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남긴 ‘수용소에서의 기록’이다. 그는 자신의 일상이 박탈당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처참한 일상을 하나하나 기록해 낸다. 그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은 원근법에 의해 지탱된다. 때때로 우리는 삶 전체에 도래한 불안이나 앞으로의 걱정, 사회적인 문제 앞에서, 그것들을 잊는 대신 눈앞의 것에 몰두한다. 내가 보내고 있는 일상이 저 ‘거대한 인생’ 혹은 ‘거대한 세상’이라는 관념을 막아준다. 우리가 만들어온, 그리고 만들어갈 하루하루의 세부들은 가까이 있기에 커 보이고, 전적이며, 그것들이 우리 삶을 이뤄낸다. 지옥의 수용소라는 아우슈비츠에서 레비는 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딘 것이 아니라, 그날을 연명할 수 있게 하는 끼니, 바로 곁의 우정, 별것 아닌 노래들로 오직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재난 속에서 우리는 먼 미래를 잃고, 대신 눈앞의 것들을 더 거대하게 만나며 일상을 버텨낸다.
그렇게 보면 재난은 도래했고 우리가 사랑한 일상이라는 것도 뒤틀리고 멀어졌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일상이 생긴 셈이다. 그 이전에는 온전히 마주하지 않던 가족의 표정과 몸짓을 더 자주, 분명하게 바라보게 됐다. 홀로 있는 시간이 무서워서 도망치던 나날 대신, 온전히 나를 보듬고 매만져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좋아하느라 몰랐던, 손수 내려 마시는 핸드 드립의 커피 맛을 알게 되기도 하고, 집에서 만들어 먹는 감바스란 어떤 것인지, 홀로 글을 쓰는 기쁨이란 무엇인지, 아이가 더 좋아하는 몸짓과 놀이가 무엇인지 더 가깝고도 깊게 알아간다. 많은 것이 달라졌고 많은 걱정과 불안 앞에 서게 됐지만, 그것이 불행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내가 채워낼 수 있는 하루가 여기, 가장 거대한 크기와 질감으로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비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유독 더 깊이 다가온다.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글 정지우_문화평론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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