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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17기억은 골목길을 떠나 나이테에 스몄다

찻길을 벗어난 크고 작은 골목에 집들이 이어져 있던 동네들. 이젠 그런 골목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다 해도 ‘재개발’로 결국엔 사라질 때를 기다릴 뿐이다. 대부분 그렇다. 요즘도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높고 높은 고층 건물 사이를 걸어 다녀본다. 경계심을 가진 싸늘한 벽과 무관심이 차갑게 느껴진다. 반세기 전일까? 아파트를 닭장이라고 우습게 여길 땐, 아직도 고만고만한 단층집들이 어깨를 겨루듯 붙어 있었다. 골목에서는 창 너머로 기침소리가 들리고 밥 냄새가 퍼지고 부부 싸움이나 아이를 야단치는 어른들의 으름장 놓는 목소리도 들렸다. 다른 사람의 생활이 귀에 들려와도 낯설지 않고 삶의 냄새가 퍼지는 골목은 사뭇 정겨웠다. 어린 날의 골목. 정신없이 놀다가 해가 져서야 아버지의 무서운 불호령이 떠오를 때, 무겁게 골목으로 들어서던 일, 동네의 골목은 사람 몸의 핏줄처럼 이어져 있었다. 성장기 내내 살았던 고향, 양양읍 성내리의 골목길도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눈에 선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어디엔 누가, 저기엔 누가, 살았던 곳. 생나물 울타리 틈으로 기름내 풍기는 지짐이를 넘겨주던 단실이 어머니. 툭하면 엉엉 울며 따라붙는 동생을 따돌리려고 몸을 바짝 붙였던 담장도 골목에 있었다.
지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살아온 내력을 설명하자니 꼭 짚어야 할 골목길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막바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생활이 몸에 붙지 않는 옷 같아서 버석거렸다. 왜 나는 ‘돈을 벌어야’ 했는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재벌의 아내가 됐어도 돈을 벌려 했을 것이라 생각되니, 팔자소관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소설가였으므로 소설을 써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아이 키운다고 소설은 못 쓰고 다양한 종류의 짧은 산문을 썼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취재를 해야 할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땐 엄마가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그 어머니. 당신 말을 빌리자면 평생 다섯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하는 어머니는 한복 바느질로 돈을 벌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아이를 집에 데려가서 며칠 있다가 오겠다고, 나에겐 편히 일 좀 하라고 말했다. 아이는 있을 땐 귀찮다가도 눈에 안 보이면 당장 보고 싶어졌다. 엄마는 제 인형 두어 개를 품에 안은 채 불안해하는 아이를 등에 업고 집을 나섰다. 나는 대문에서 그냥 들어가라고 말하는 엄마를, 기역 자로 꺾여 한참이나 야트막한 비탈로 내려가는 골목까지 배웅했다. 엄마는 딸이 홀가분하게 소설 좀 쓰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골목길을 구부러져 돌아가려는 엄마 등에 업힌 아이가 벌써 보고 싶어졌고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에 오싹했다.
“엄마!”
나도 모르게 엄마를 향해 달려가며 비명처럼 불렀다. 내 목소리는 날카롭고 매정했을 것 같다. 엄마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때 엄마의 표정에 나타났던 의아함. 그림 한 장처럼 또렷했다.
“엄마! 연탄가스 조심해!”
내가 소리쳤다. 엄마의 등에 업힌 아이만 빼오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며. 그러나 동시에 엄마의 얼굴에 비낀 참혹함, 슬픔과 서러움과 섭섭함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 침묵하다가 결국 수치심과 참혹함을 지르밟으며 헤어졌다. 등을 돌려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았다. 엄마가 막 구부러진 골목을 꺾어 가물가물 보이지 않았다. 달려갈까, 엄마 죄송해요, 매달리며 용서를 구해볼까. ‘불효(不孝)’의 쓰라린 죄책감은 엄마가 결코 떨쳐내지 못했을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엄마와 나의 인연에 실금이 갔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가 여태 단 한 번도 연탄가스가 스미는 방에 대한 걱정이나 염려를 한 적이 없었음을 곱씹었다. 엄마를 내 삶의 소모품처럼 여기는 이 불효가 딸에게 전염될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또 한 가지.
바로 그 골목에는 앞뒤 사방으로 정이 든 ‘이웃사촌’들이 있었다. 별식을 하면 나눠 먹고, 어느 집에 어려움이 생기면 모여 서서 걱정하곤 했다. 골목에서 나는 ‘늙은 새댁’이었고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할 맏며느리였다. 첫딸을 낳았을 때 골목의 여론은 ‘맏이는 딸’이 좋다! 거나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했다. 어쨌든 뒤늦게 둘째를 임신했고 골목 여론은 나의 불룩한 배와 허리 모양이 딱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하루가 멀다 하고 가지가지 고추가 등장하는 꿈을 꾸었다. 풋고추, 붉은 고추, 매달린 고추, 볕에 널어놓은 고추 등등.
여자는 온갖 지병을 산후조리로 고친다는 속설을 믿어 엄마는 이번에 아이 낳고는 몸조리를 잘 하라고 말했다. 나도 그런 결심을 했다. 더 낳지 않을 테니까. 설사 딸이라 해도!
나는 골목의 이웃사촌들이 기대하고 꿈꿔주고 응원하던 아들 대신 딸을 낳고 산후조리로 한 달을 꽉 채웠다. 한 달이 지나자 몸과 얼굴의 부기도 좀 빠지고, 골목의 인심이 그립고 궁금해서 좀이 쑤셨다. 그런 어느 날 새마을 노래가 골목을 향해 점점 크게 울려 퍼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노랫말이 청소차의 신호였다. 대부분의 집들이 쓰레기와 연탄재가 담긴 통을 들고 나와 청소차를 기다리곤 했다. 이렇게 차를 기다리는 길지 않은 시간에 골목의 그 장소는 동네 방송국이 됐다. 누가,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어쨌고 등등.
그 방송국의 얼굴들이 그리웠다. 또 딸을 낳았다는 걸 내 입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입춘은 지났지만 아직 바람이 찼던 그날 아침, 산후풍을 맞을까 염려해 잘 싸매고 골목으로 나섰다. 딸을 낳았어도 괜찮다고 말해야지, 즐거운 수다가 입안에서 바글거렸다. 그러나 골목길로 발을 내딛는 순간 백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웃지 않았다. 가까이 가도 침묵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그랬다.
나중에 알았다. 내가 딸을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내가 아들을 낳아야 하는 며느리라는 걸 알았다. 심지어 아들 못 낳은 맏며느리의 삶에 닥칠 불행까지도 예측하면서.
다 옛날이야기다. 요즘 젊은 여성들에겐 괴담(怪談)일 것.

글 · 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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