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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연출가 강량원 연극은 곧 삶이자 ‘그믐’
지난해 초연 당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호평을 받은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이 10월 9일부터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무대에 오른다. 극의 형식적 완결성과 선명성을 보완해 관객과 다시 만날 준비를 하고 있는 강량원 연출을 만났다.

“‘좋아요’라고 한 관객이 무려 80%?”
철학자의 날카로움, 소년의 눈빛, 때론 현자(賢者) 같은 푸근함을 가진 강량원 연출이 연극 <그믐…>을 들고 돌아왔다.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은 지난해 초연 당시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월간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 등 주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평단으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은 건 둘째 치고, 정작 그가 가장 놀란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그동안 제 작품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많아봐야 관객 4명 중 1명 정도였을까요? 절반만 넘어도 다행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지난해 <그믐…>은 관객의 80% 이상이 긍정적으로 봐주셨더라고요. 극을 만든 제게도 정말 큰 놀라움과 생경함을 던져준 작품입니다. (웃음)”

관객에게 ‘조금은’ 더 친절해진 작품

연극 <그믐…>을 막바지 점검 중인 강 연출을 서울 중구 남산창작센터에서 만났다. 공연은 10월 9일부터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막을 올린다. “지난해 공연이 유독 뜻깊다”는 소회를 밝힌 그는 인터뷰에 앞서 생각을 정리할 흰 노트를 펴고 자리에 차분히 앉았다.
작품 얘기에 본격 돌입하자 그의 눈빛도 달라졌다. 얼굴에서는 연습실에서 그가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해졌다. 덥수룩한 수염과 푸근한 미소 안에서도 왠지 모를 고민의 깊이가 뿜어져 나왔다.“요즘에는 지난해 공연의 형식적 완결성을 보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인물의 감정 변화 등 관객들이 보기에 흐릿했던 부분을 좀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일이죠.”
강 연출이 극의 완결성, 선명성을 보완한다는 건 그만큼 작품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한다. 관객의 긍정적 반응에 놀란 것도 그간 선보인 작품이 썩 ‘친절한’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단선적 시공간을 복합적으로 뒤섞은 줄거리”를 신체행동 연기로 풀어냈기에 연출은 더욱 쉽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예상보다 긍정적 반응이 나온 이유를 묻자 “잘 모르겠다”면서도 “다만 원작소설이 워낙 뛰어나고, 우리가 표현한 형식이 기억에 관한 내용을 담아내기에 적확했던 것 같다”며 자세를 낮췄다. 이어 “공연을 위해 서울 남산예술센터까지 먼 발걸음을 해준 관객들이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극에 열려 있는 태도를 가진 덕분”이라며 웃었다.
<그믐…>의 대략적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급생 영훈을 죽인 남자는 교도소와 정신병원에서 9년을 보내고 세상으로 나온다. 고교 시절 남자와 연인 사이였던 여자는 어느 날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 남자가 보낸 소설 <우주 알 이야기>를 읽고 본인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이를 계기로 15년 만에 여자와 재회한 남자는 자신의 살인이 주변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닫고 시간을 되돌릴 방법을 찾는다.
시간과 기억, 상처와 사랑, 죄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는 ‘우주 알’(Cosmic Egg)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펼쳐진다. 무대에는 크기와 경사가 다른 두 개의 달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서 배우들의 신체행동 연기를 거쳐 인물들의 기억과 현재가 뒤섞인다. 시간이 뒤섞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반적인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파편화된 기억은 얼기설기 얽혀 관객 앞에 던져진다. 강 연출은 “최종적으로 관객은 인과관계를 알 수 없게 뒤섞인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모두 ‘남자’ 한 인물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그믐’도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키워드다. “그믐달은 해가 있을 때 뜨는 걸 아시나요? 다만 햇빛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죠. 그렇다고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믐달처럼 우리의 과거도, 기억도 생생하게 우리 곁에 있어요.”

1, 2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2018년 공연 모습. (남산예술센터 제공)

'기억’을 공부하고, 더듬는 과정이 곧 창작 과정

언뜻 듣기만 해도 ‘이 어마어마한 내용이 무대에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소설을 처음 접한 강 연출은 “이거 우리(극단 ‘동’)가 하기 딱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는 원작의 서사에서 ‘기억’에 초점을 맞췄다. 3년의 준비 기간과 긴 연구 작업을 거쳤다.
“원작소설을 공연으로 만들겠다고 출판사에 허락을 구한 게 벌써 4년 전이네요. 배우들과 함께 ‘기억’에 관한 다른 도서도 섭렵했어요. 원작은 결국 기억의 파편을 모아놓은 작품이더라고요. 작가가 ‘왜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했을까’를 끝없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렇게 작업 기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죠. (웃음)”
무엇보다 원작을 이해하고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 방향을 잡는 게 당면 과제였다. “저희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연기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해한 텍스트를 배우들의 ‘몸’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꽤나 오래 걸렸죠. 그만큼 탄탄한 작업을 거쳤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하나도 허툰 것이 없다. 비틀거리거나 몸을 구부린 채 한 방향으로 돌 때에도 ‘시간의 순행, 역행’ 등 각기 다른 의미를 담았다. 또 배우들은 기울어진 무대를 균형이 깨진 상태로 움직이며 서로 배회한다. 어떤 시공간에서든 자기만의 궤도를 도는 인물들의 모습 역시 다차원적인 기억을 나타낸다.숙지한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은 토론의 연속이었다. 그는 “전작 <투명인간>처럼 관객들이 너무 어렵게 느끼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고 했다. 이 같은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더욱 꼼꼼하게 각색에 임했다.
각색을 맡은 정진새 작가와 극단 ‘동’은 15주 동안 매주 만나며 토론했다. 관객에게 던지고픈 바는 명확해졌다.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기억은 어떻게 하면 순기능을 할까’다. 강 연출은 “우리가 생각한 기억은 과거에만 속한 게 아니라 현재를 재구성하는 유용한 필터”라며 “기억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존재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끝없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어렴풋한 개념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 연출은 “한 인물을 볼 때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생물학적 피부와 형체만을 볼 게 아니라 관계된 모든 부분들까지 봐야 한다”며 “하나의 주체라는 건 고정되어 있거나 정제된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야기, 역사라는 것도 옛날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현재화시켜서 지금 우리의 삶과 만나는 작용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는 연출자의 의도와 관객 사이의 빈틈을 철저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뒀다. 때문에 ‘전달’이라는 말 대신 ‘참여’, ‘독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는 “극 중 인물이 특정 시점에 그 일을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해당 시점에 어땠는지 등 줄거리, 인물의 감정에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이를 독해하길 바란다”고 했다.

극단 ‘동’만의 고유한 색깔

강 연출이 이끄는 극단 ‘동’은 1999년 설립 후 신체행동 연기를 통해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현해왔다. 국내에서도 극단 ‘동’을 이야기하면 평단, 관객은 고개를 끄덕인다.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떠올리는 극단만의 색채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극단의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절대 우리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옳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전제를 붙였다. 어떤 작품이든 관객을 흔드는 힘이 있고 매력도 다르다는 의미다.
“관객에게는 쉽게 잘 풀어진 편안한 작품도 필요하고 그런 작품이 주는 감동도 있어요. 그런 작품은 저희와 다른 참여 방식을 요구할 뿐이죠. 저희 극을 본 관객이라면 극을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펼쳐야겠죠. 물론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봐도 잘 모르겠다’는 반응마저도 많은 참여 노력 끝에 나온 말인 것 같아 저는 너무 반갑더라고요. (웃음)”
극단 ‘동’은 상대방 그리고 세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을 연기 메소드로 삼는다. 이들이 신체행동 연기를 파고드는 이유다. 베르그송, 들뢰즈 등을 공부했다는 강 연출의 철학자 같은 면모가 다시금 발휘됐다.
“행위의 주체는 한 개인이라기보다 그 개인이 만나는 세계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배우가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가 어떤 행위인지 관객에게 설명하거나 제시하지 않아요. 관객이 직접 느껴야 하는 거죠. 관객은 직접 비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채우는 역할을 합니다.”쉽게 말하자면 한 인물의 행위는 그 행위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삶 전체를 바라보며 한 인물이 겪은 모든 사람, 세계를 이해해야만 행위의 본질을 알 수 있다는 취지다.
그는 “모든 게 어려워도 항상 실험적인 연기를 추구하는 단원들 덕분”이라고 했다. 일반적 극단이 연출의 디렉팅과 이를 따르는 배우들의 조합으로 운영되는 반면 ‘동’은 모두가 곧 연출자이자 연기자가 된다. 더 지속적이고 섬세한 작업을 장기간 거쳐야만 작품이 완성된다.
강 연출은 “캐릭터를 연구한 뒤 각자 의견을 발표하면 나 역시 간단한 감상이자 코멘트를 줄 뿐”이라며 “연출보다는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전하는 게 내 몫”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동’의 연습실에서는 “이런 부분들은 잘 안 온다”, “이해가 안 된다”는 피드백이 주로 오간다.
배우는 피드백을 거쳐 수긍할 부분이 있다면 연기를 수정하고 다시 단원들 앞에서 연기를 발표한다. 이 방식을 반복하면 극은 촘촘히 다듬어진다. 강 연출은 “이런 과정에서는 내가 연출이라고 해서 뭔가 끝없이 지시할 수가 없다”며 웃었다.

연극만 생각하는 ‘뼈극인’

“다른 극단과 차별화된 ‘신체행동’이란 방식으로 연극 작업을 계속해온 것이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합니다.”
강 연출은 2016년 동아연극상 시상식에서 연출상을 수상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그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 방식이 늘 실험적이라고 판단되는 것 같다”고 했다. 실험이라는 건 새로운 시도지만, 대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 수 있다. 수상 순간을 떠올리던 그는 “그래도 내 연극 방식이 주요한 표현 방식 중 하나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한 건 대학 연극반 때였다. 이후 극단을 직접 운영하기 쉽지 않다고 느껴 대학원에 진학했고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러시아로 유학도 떠났다. 그는 유학 시절 “‘예술이란 건 온몸을 다 열어야 한다’는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고 했다. 이어 “유학을 다녀온 지 너무 오래되어 다른 건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작품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미소 지었다.
그의 삶은 곧 연극이 됐다. 쉴 때는 영화를 자주 본다지만 이마저도 연극에 끌어들일 만한 내용을 찾기 위해 보는 편이다. 졸면서 하루에 3편씩 영화를 볼 때도 있다. 다큐멘터리보다는 극영화를 선호한다. 최근엔 짐 자무시 감독의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를 인상 깊게 봤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 괴물,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끌리더라고요. 난민 이슈와 연결 지어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민은 우리 몸 안의 어느 부위인지 생각하다 보니 뱀파이어까지 연결되더라고요. 조만간 무대에 관련 공연을 올려볼 생각입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까. “작업 활동이 곧 스트레스 해방구”라는 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다른 취미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돌이켜보면 그는 올해만 해도 <새닙곳 나거든>, <콘센트-동의> 등 초연작과 창작극 <거대한 뿌리>를 맡았다. 주변에서도 걱정하는 이가 많아 “쉬엄쉬엄 해라”, “뭘 그렇게 많이 하느냐”는 핀잔도 듣는다.
“물론 작품 활동이 일이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놀이에 더 가까워요. 작품을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거나 배우의 연기를 볼 때면 개운하기도 하고 배우들이 느끼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지는 것 같 아요.”
인터뷰를 기회 삼아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그가 생각하는 예술관을 밝혔다. 남들이 말하는 ‘저 짓’(연습)을 할 수밖에 없는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다.
“아침부터 ‘저 짓’(연습)을 죽어라고 하는데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예술가로서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생기는 거죠. 마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어떤 이상에 도달하고 싶은 겁니다. 저희 극단의 언어로 설명해보자면 ‘주체’라고 생각하는 이 모든 세계와 나 자신이 연결되는 경지랄까요. 나아가 생물학적 인간의 피부 안으로 모든 주체를 몰아넣는 이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강 연출은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도 맡고 있다. 덕분에 ‘공연 메카’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공연을 가질 기회도 잦은 편이다. 그는 “서울 관객과 다르게 지방 공연을 갈 때면 관객이 극에 좀 더 다가오도록, 더 예민하게 촉수를 뻗을 수 있도록 전략을 써야 한다. 연출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관객은 물론, 사회와 본인 자신에게도 작품을 통해 말을 거는 그에게 연출가로서의 목표와 인생의 목표를 물었다. 그는 “정말로 삶의 목표를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다른 뭔가를 하다 정신 차려보면 계속 작품만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했다. 평생 연극과 씨름하며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연극은 곧 삶이자 ‘그믐’이었다.
글 김기윤_동아일보 기자
사진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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