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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원서동 고희동 가옥한옥의 오해를 푸는 열쇠
1918년 화가 고희동(1886~1965)은 원동 16번지에 직접 설계한 이상한 기와집을 지었다.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1853~?)은 역관으로 중국에서 영어를 배웠고, 일본·미국 등지로의 사행(使行)을 통해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일찍 접한 인물이다. 고희동 또한 190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로 관비 유학을 다녀왔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다.

1 담장과 건물 전면.
2 마당에서 본 지붕.

1915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고희동은 1918년 원동에 집을 지어 이사를 왔다. 원동은 창덕궁 후원(後苑)에서 나온 지명인데, 이후 후원 서쪽이라는 원서동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창덕궁 선원전(대보단)과 창덕궁 담장, 북영천 사이의 깊숙한 골짜기였다. 고희동 가옥의 지붕은 한식 기와이고, 구조는 한식 목구조이다. 하지만 공간은 서양식 포치(porch) 형태의 발코니가 있는 응접실, 건물 측면의 현관, 작업실 등과 일식 주택의 정원을 따라 각 실을 연결하는 긴 낭하(廊下)와 같이 마당(혹은 정원) 쪽으로 긴 복도로 각 실을 잇고 있다. 고희동 가옥은 당시의 다양한 주거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1)

한옥과 조선집 사이

“일본 집은 구리기와, 나무기와 등의 차이는 있으나 한 칸의 넓이와 창호의 잣수는 임금, 관백으로부터 가난한 백성의 집에 이르기까지 다름이 없다. 가령 문이 한 짝 없으면 저자에 나가 사오는데 집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꼭 맞는다. 병장( ?障)과 상탁(床卓) 등속도 부절(符節)이 맞듯 한다. 그러나 주관(周官)의 일부가 도리어 섬 가운데에 있을 줄은 뜻밖이다.3)
“북촌에 게딱지같이 낮은 초가집! 주룩주룩 비가 새던 계동, 가회동 일대는 최근 30년래로 시골의 지주나 상인이 와서 옛집을 헐어제치고 선양절충의 화려한 신주택을 지어 면목을 일신하였다.”4)
금년 봄 이래로 서울의 북촌산 밑 일대는 어느 한 곳 빈틈이라고는 없이 모조리 산을 파내고 허러 내리워서 집을 자꾸 짓는 형편으로 대략만 치드라도 4천여호가 새로히 생겨낫슬 것이다.”5)

이후에도 사신들은 지속적으로 중국·일본·미국 등지로의 사행과 유학을 통해 신문화를 받아들였고, 개화6)를 주장했다. 1884년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주도 세력인 김옥균(화동), 박영효(경운동), 홍영식(재동), 서광범(안국동), 서재필(화동) 등은 북촌 지역에 모여 살았고, 정변 실패 후 이들의 집터는 대부분 근대교육 시설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북촌은 조선 지식인들이 모여 사는 주요한 조선인 주거지가 되었다. 이에 일제강점기 북촌의 주거 문화는 일본인 주거지 남촌의 일식 주택이 아닌 양옥이나 개선된 조선집을 선호했다.

3 복도(안방 방향).
4 복도(작업실 방향).

새로운 조선집 실험의 바로미터

당시 조선인 주거 담론은 현관, 응접실, 서재 등의 새로운 주거 문화와 부엌, 변소 등의 위생적인 개선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이는 양옥에 조선식 주거 문화를 넣거나, 조선집에 새로운 주거 문화를 도입해 개선한 절충 형태로 선양절충(鮮洋折衷) 등으로 표현된다. 이런 흐름은 1920~1930년대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개발된 북촌의 조선집7)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북촌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반일감정, 개화, 신분제 폐지, 근대교육 등의 사회 변화가 집약된 곳이었고, 따라서 주거 문화도 조선집을 계승하며 새로운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문화적 통합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고희동 가옥은 주거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이루어진 새로운 조선집 실험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실험이 지속되었다면 이 땅의 주거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고희동 가옥은 현재 조선시대 기와집 정도로 고착된 한옥이라는 인식의 오해를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1. 정기황 외 6명,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북촌 십일가의 오래된 기억>(2019. 서울역사박물관)을 참고해 작성했으며, 현재 이와 관련된 전시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7. 19~10. 6)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2. 현재 한옥은 특정한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시기적으로 조선후기, 형식적으로는 기와집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대부분의 주거는 초가집이었고, 현재 남아 있는 기와집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이다. 더불어 고상식 주거의 특징인 남방의 마루, 캉(坑) 등 북방의 온돌은 조선시대 중기 일반화되었지만, 현재는 한옥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즉 주거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온 것으로 문화다. 따라서 물리적 양식으로 특정해 규정하려는 것은 부적절하다.
  3. 박제가(1750~1805), <북학의>(北學議, 1778(정조2년)), p. 93, 을유문화사, 1977 / 김순일, <조선후기의 주의식에 관한 연구>, p. 21, <대한건축학회지 25권 98호>(1981년 2월) 재인용. 이외에도 주거와 관련된 <연행록>의 기록이 많다. 조선시대 주거 담론은 대체로 ‘왕실과 사대부 가옥’에 국한된 것이었다. 박제가의 주장과 같이 백성들의 주거에 대한 것은 거의 없으며, 조선후기에 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4. <대경성의 점경>, <사해공론> 제1권 제6호, 1935년 10월 1일.
  5. 정세권, <暴勝하는 土地, 建物時勢, 千載一遇인 戰爭好景氣來!, 어떻게 하면 이판에 돈버을까>, 삼천리 제7권 제10호, 1935년 11월 1일.
  6. ‘개화성무’(開花成務)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약자로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경영해 백성들이 새롭게 변화하고 생활(문화와 풍속)이 잘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주거는 사물과 생활의 집약체로 개화의 중요한 요소였다.
  7. 현재 도시한옥이라 지칭되는 이 유형은 집장사집, 개량한옥 정도로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양사(정세권) 등이 개발한 조선집은 도시에 적응해 밀도를 높여 대량생산했고, 건양주택(중당식)이라는 기존 조선집을 개선한 배치와 평면을 제안해 개발하는 등 도시화와 대중적 주거 공급의 시작점으로 한국 주거사의 큰 의의를 갖는 사료이다.
글·사진 제공 정기황_건축학 박사, 사단법인 문화도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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