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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10흑석동 그곳엔 잊히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이 글을 쓰려고 여러 날, 아니 많은 날 동안 그 시절의 나날들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그해의 흑석동. 1973년인가, 그 이듬해였던가. 가물가물하다. 이맘땐 하루하루 거의 참담한 기분으로 일기를 썼었다. 무언가 나를 기록으로나마 남겨두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일기 형태로 남아 있는 ‘그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겐 기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어떤 시기에, 그 이전까지의 모든 기록을 불태워 없애는 것이다. 나름의 화형식이었을 것이다. 내 삶을 화형시키는 것. 이를 테면 과거를 재로 만들어 지구에서 없애는 것. 아마 세상과 불화해서, 아니면 낮은 자존감이 그런 미친 짓을 낳았을지 모른다.
나이가 일흔으로 접어들면서 강박증 하나가 더 생겼다. 나 아니면 소중하지 않을 사진, 편지, 메모 같은 것. 책들과 너무 많은 소유물들. 아마 젊을 때처럼 화형식을 하고 싶은데, 아파트 생활에서 화형식은 불가능. 오늘도 쓰레기에 파묻혀, 갇혀서 산다. 혹시…… 아직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게 많은 건 아닐까?
아, 오늘의 공간인 흑석동으로 돌아가야겠다. 그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치기가 만발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웠다. 절망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부모님 같은 김동리 선생님을 찾아가 ‘살게 해달라고’ 졸랐다. 오래지 않아 일자리를 구해주셨다.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오후에 두세 학년을 가르치는 부업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마치 도시에서 도시를 가는 것처럼 멀었다. 하지만 흑석동엔 동업자 친구 송기원과 시인 이시영이 살고 있었다. 연못시장이라는 곳. 갈 때마다 그곳에 들렀다. 늘 여성독자들이 있곤 해도 흔연하게 반겨줘서 고맙고, 좋았다.
연못시장에서 나와 수업을 하려고 학교 정문을 통과하면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고만고만한 학생들이 축구공을 따라 움직이고 있어서 그 눈길의 향방을 어림하기는 불가능했다. 2학년 수업. 맨 앞에 앉아 있던 남학생. 산만하고 엉뚱했다. 그러나 날 좋아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장래희망을 소재로 글짓기를 하라고 했더니 ‘나는 커서 도둑놈이 되겠다’란 제목의 글을 썼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예를 들면 1,000원을 훔쳐서 500원은 누굴 주고 500원은 자기가 쓴다고 그랬던가? 내용을 읽고 깜짝 놀랐지만 마치 육친의 슬픔과 불행을 느끼는 것처럼 가슴이 아렸고 얼음으로 박혀서 오래도록 녹지 않았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 돌아가려고 주섬주섬 자료 따위를 챙기는데 그 학생이 다가왔다.
“선생님! 100원만 주세요!”
그랬다. 놀랍고 좋았다. 100원을 주었다. 안정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울 불안감 따위가 그 애의 겉모습에 감돌았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배가 고파 학교 근처의 만둣집으로 가는데 가게 앞에서 여전히 산만한 그 애를 만났다. 그 애와 마주 앉아 만두를 시켜서 나눠 먹었다. 그 앤 나를 마주 보지 못하고 몸을 대각선에 뒀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아 그 애에 대해 알았다. 엄마 아빠는 함께 살지 않고 그 애는 여관방에서 아빠랑 지낸다. 아빠는 늘 늦게 돌아온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나의 글짓기 수업을 참관하기로 했는데 말이 참관이지 시험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로서는 잘 보여야 비정규직에서 잘리지 않을 터, 걱정이 태산으로 쌓였다.
2학년 수업으로 시작했다. 다른 날과 달리 긴장해서 앞뒤가 그저 새카맣기만 했다. 교실 뒤에 서서 나를 지켜보는 눈길들이 낱낱의 공포탄이었다. 공포가 생명에게 가장 악질이라는 건 따로 증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른 날엔 질문하면 서로 대답하던 학생들이 쉬운 걸 물어도 손을 들지 않고 침묵했다. 그 침묵 때문에 급기야 나는 길을 잃었다. 이럴 때 앞줄의 학생이 손을 번쩍 추켜들었다. 불안하고도 기뻤다. 지금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앤 중구난방, 질문과 맥도 닿지 않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오래도록 그랬다. 수업은 그 애의 동서남북 어디에도 닿지 않는 말로 아주 길을 잃게 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애가 나의 당황을, 아니 절망을 이해하고 도와주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 애와 헤어진 뒤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나는 나름 열심히 소설을 쓰고 책도 꾸준히 냈다. 이즈음에도 가끔 연못시장이 있던 곳과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자리로 갈 때가 있다. 반드시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연못시장의 가난과 절실한 삶들이 밀려난 자리엔 고층빌딩과 병원 등이 들어섰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거다. 존재하는 건, 하여튼 변하기 마련일 테니…….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그림 김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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