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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황병승 시인에 대한 ‘사회적 타살’ 논란어느 시인의 죽음
“1년 내내 수입 없이 멜랑콜리(우울)하게 살았어…. 10년 동안 만났던 애들도 전화 안 하더라.” 지난해 동료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외로움’을 토로하던 한 시인은 이듬해 싸늘한 주검으로 자택에서 발견됐다. 시인의 자택은 아무도 찾지 않았다. 시신은 심하게 부패했고 경찰은 최소 20일 이상 시간이 지났을 것이라 추정했다.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로 잘 알려진 고(故) 황병승 시인의 얘기다.

많은 동료 시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애도했다. 조동범 시인은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정병근 시인은 “비통하다는 말조차 하는 것인가. 명복을 빌기엔 내 말이 가볍네”라고 시인을 추모했다. 소설가 신승철은 “내게는 공손하고 수줍어하던 예대 문창과 후배였는데 그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 시인이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 주장했다. 성폭력 ‘무고’의 피해자 박진성 시인은 황 시인 역시 그동안 억울함을 토로해왔다며 그와의 통화 내용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황 시인은 문학계 ‘미투’가 잇따르던 2016년 성희롱 대상자로 지목됐다. 그해 11월 서울예대에는 ‘문단 내 성폭력 서울예대 안전합니까?’라는 대자보가 붙었고 재학생 2명은 “(황 시인이) 시인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피해자 A씨를) 술자리에 데려갔고 데이트도 몇 번 했지만 1∼2주 후 여자친구가 생겼다면서 관계를 정리하려 했다”며 “(황 시인이) ‘여자는 30 넘으면 끝이다’라는 언어폭력을 가했고 술에 취해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관심에 따라 대자보는 순식간에 기사화됐다. 황 시인은 대자보를 기사화한 기자와의 통화에서 “저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상처를 입은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답했고 스스로 자숙을 택했다. 이 발언이 그의 성폭력 혐의를 입증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박 시인도 당시 성폭력 의혹이 불거지자 블로그에 ‘사죄드린다’는 글을 올렸고 당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일부 작가도 사과문을 올렸다. 박 시인은 황 시인이 성희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해 사과한 것이고 이후 소송까지 준비했다고 주장한다. 제3자에 의해 전해진 대자보는 의혹만 남겼고 경찰의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피해를 주장한 여성은 제3자에게 제보했을 뿐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성폭력 의혹 당사자라는 ‘주홍글씨’가 찍힌 작가에게 드리운 칼날은 잔혹했다. 황 시인이 준비 중이었던 출판 계약은 모두 중지됐고 월 150만 원 남짓 벌던 문학 강연들도 줄줄이 취소됐다. 작가에게 다음 출판 계약이 힘들어지는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유가족에 따르면 황 시인은 술에 의존해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쓸쓸히 골방에 갇혔다.

1 2016년 서울예대에 붙은 황병승 시인의 성희롱을 고발하는 내용의 대자보.
2 황병승 시인의 <여장남자 시코쿠> 표지 이미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작가들은 우리나라 문화계야말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분야라고 꼬집는다. 일단 의혹에 휘말리게 되면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작품이 정지되는 등 치명적인 처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 이슈 성범죄의 경우 유죄 판결 없이도 큰 파급력을 가진다. 사람들은 의혹만으로 당사자에게 ‘성범죄자’ 낙인을 찍는다.
박 시인도 2016년 성폭력 대상자로 지목되어 출판사로부터 그간 작품들의 출고 정지 통보를 받았다. 그는 무고 판결 이후 “내 시집은 감옥에서 살고 있는데 면회도 안 된다”며 “출판사에게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나는 여전히 범죄자”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1인 시위까지 나서며 출고 정지 해제, 다음 시집 출판 계약 이행 등을 요구하고 있지만 출판사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던 드러머 남궁연도 자신을 둘러싼 성폭력 의혹이 ‘혐의 없음’으로 결론나자 “몇 달간 아내가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일도 다 끊겼으며 방송국에서는 섭외 자제 대상이 됐다”고 고통을 토로한 바 있다. 만화가 박재동 화백도 지난해 강의 중 부적절한 발언을 하고 후배를 성희롱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재직 중이던 한예종에서 정직 3개월 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처분이 부적절하다는 소송을 제기해 지난 7월 1심에서 승소했다.
미투운동은 그동안 권력에 억눌려 성범죄에 침묵했던 여성들이 용기를 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해 지난 2월 1심에서 승소한 최영미 시인의 용기도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폭로가 미투운동의 본질을 훼손하기도 한다. 나아가 폭로 대상자의 삶과 가족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는 것은 폭력이다. 황 시인은 공개된 통화 녹음 파일에서 “사는 게 거지다. 이게 삶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글 안승진_세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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