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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서소문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마음의 여백을 새기는 공간
한때 서울에 8개의 크고 작은 문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네 개의 큰문을 일컫는 서울성곽 4대문은 옛 수도의 경계를 짐작하게 한다. 그나마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그런 큰문(大門) 사이에 일반인들이 왕래하던 작은 문이 있었다. 4개의 작은 문을 뜻하는 4소문은 홍화문(동북), 광희문(동남), 소덕문(서남), 창의문(서북)으로, 소덕문은 그 위치 때문에 서소문으로 불렸다. 이 문들은 일제강점기 때 헐리거나 근대화로 도시 경계가 확장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많지 않고 모습도 없어져 버렸으니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최근 한양도성 복원사업 등이 장소들을 살리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서소문역사 공원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또한 사라진 서소문 일대의 특별한 역사적 기억들을 새로운 형식으로 되살리고자 만들어졌다.

1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입구.

근린공원에서 역사공원으로

2011년경 일반 근린공원이었던 서소문공원을 역사공원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지상은 공원(서소문역사공원)이고 지하는 추념공간과 전시장(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등으로 조성되었다. 이 부지는 실제 서소문 자리가 아니라 서소문 바깥 사거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상여가 드나드는 문으로 죽음의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공원이 있던 장소는 참형이 집행된 조선시대 이름난 사형지였다. 반역 죄인뿐만 아니라 전봉준, 홍경래 같은 의인들과 정약종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 사상가들이 처형당했다. 또한 44명의 순교성인이 배출된 국내 최대 천주교 순교지로도 알려져 있다. 사형장이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과일시장으로 사용되다 1973년부터 근린공원으로 활용되었다. 과거의 시린 시간들이 새롭게 문을 연 이곳의 강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서소문역사공원 부지는 경의선과 염천교 등으로 인해 주변과 단절되어 있다. 서울역과 가까운 교통 요충지에 자리하지만 복잡한 도시 구조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2011년부터 서울중구청과 천주교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2014년 현상설계 결과 인터커트+보이드+레스건축 팀의 <EN-CITY_ENGRAVING the PARK>가 당선되었다. 근린공원이 역사공원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곳에 적정 규모의 건축물을 포함할 수 있음을 뜻한다. 당선작은 그 제목처럼 땅을 음각한다는 행위에 방점을 두고 기념공간을 지하에 삽입하여 극적인 공간감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 건축계에서 호평을 받을 만큼의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 결과, “느슨하고 산만한 기존의 도시조직에서 공원과 역사유적지를 적절히 분리해 두 세계가 성공적으로 만나게 했다”, “전체 공원의 배치와 실내 공간의 크기 등에서 그 유기적인 흐름이 매우 아름다운 호흡을 가지고 있다”는 총평을 받았다.

2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콘솔레이션(Consolation)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공공건물

그로부터 5년 후인 2019년 6월, 개관식을 통해 공개된 이곳의 새로운 모습은 많은 문화계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호평의 기저에 깔린 공감대는 이 정도 규모의 양질의 공간적 경험을 예산이 한정된 공공건물에서 본다는 놀라움이었다. 그간 공공건물은 사업의 중요성과 공공의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체와의 협조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고, 부족한 예산과 일정 속에서 급히 사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 결과 최종 건축물은 계획과는 다르게 여러 상황들이 변경되어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뿐만 아니라 실제 기능적으로 필요한 여러 프로그램도 이와 동반해 같이 훼손되었다. 그에 비해 서소문 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역설적으로 관이 관행적으로 주도하지 않은 결과물 같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 있다. 이런 결과물을 만들기까지 건축가와 협력 전문가들 그리고 발주처 간 엄청난 조율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의 핵심적인 아름다움은 지하에 있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무용해 보이는 공간들에 있다. 각 층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비어 있지만 충만한 느낌을 주는 우물 같은 공간들이 자리한다. 서슬 퍼런 이곳의 옛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운 고요함이다. 최근 서울의 신축 공공건물 중 이 정도로 충분한 여백을 확보하여 열린 공간감을 만들어낸 곳은 흔치 않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하라는 조건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울에는 빈 땅이 거의 없고, 더 높이 더 빨리 용적률을 충분히 확보하여 건물을 세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간감이란 단순히 벽과 벽을 세운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선의 안배, 적절한 개구부 삽입, 재료의 질감, 빛이 유입되는 방향 등 섬세한 요소들이 함께 모여 공간의 분위기가 결정된다.

‘비움’의 의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는 ‘비움’이다. 비움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현대사회에서 유용하지 않은 감각이다. 그래서 이곳은 아파트와 상가 등 획일적이고 기능적인 공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동선은 복잡하고, 공간을 쓸데없이 허전하게 비워뒀다는 민원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건축에서 잠시 목적 없이 나아가는 소요(逍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램프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지하 3층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레퀴엠이 귀에 감겨온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하늘 마당에서 만나는 바깥 풍경은 극적이다. 나는 우리 일상에 이처럼 압도적인 빈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광장이든 마당이든 혹은 베란다든, 비워두지 못하는 것은 현대 한국인들의 강박증적 태도다. 아파트의 여백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베란다도 확장하여 거실로 사용하고, 마당과 광장도 늘 각종 이벤트로 채워져 있다. 비어 있음을 두려워하거나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기에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는 서소문 일대의 사회지리적인 역사 기록, 천주교 항쟁사와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 중이었지만, 내게는 전시 콘텐츠보다 이 텅 빈 공간 자체가 가장 중요한 작품처럼 다가왔다. 이 인상을 각자의 마음으로 가져오고 새기는 것은 중요하다. 과거와 지금의 시간을 연결해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도가 적어도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많은이들을 기념하는 유효한 방법의 시작은 아닐까.

글 정다영_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공간> 기자를 거쳐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다. 전시 기획과 시각문화 연구를 진행하며, 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출강 중이다.
사진 제공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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