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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7우상(偶像)이라는 열등감, 혹은 허영과 거짓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면, 삼선교 네거리쯤에서 오른편 창밖을 살피고 훑어보고 심지어 속도에 밀리면 고개를 빼서 그 네거리의 어느 건물을 바라보곤 한다. 처음엔 왜 ‘네거리 모퉁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가지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알게 됐다. 아, 그래! 저 건물이야. 그대로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도 보이고……. 놀라웠다. 거의 반세기 전쯤의 어느 겨울날, 한 번인가 가본 그 지하 다방.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강남에서 살아보지 못하고 늘 미아리고개를 넘나들며 서울 살이를 해온 수십 년 동안 무수히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나는 저 삼선교 모퉁이의 지하 다방을 떠올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즈음 낡은 4층의 그 건물 지하에 마음이 가는 건 바로 이 연재물 때문이다. 연재의 주제가 나의 사적 공간과 그 공간에 스며든 시간에 대한 회상이니까. 공간을 더듬는다는 건 세월과 추억과 기억의 일이니까.
경험이란 추억도 참 신기하다. 인생 전부가 경험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축적은 퇴적층을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라지고 지워지고 흔적도 없어진 경험이 많을 터. 그런데 경험이라는 것이 씨앗이나 미생물처럼 지수화풍(地水火風)만 모여들면 세월이란 시간과 상관없이 되살아난다.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현재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현재가 된 경험의 씨앗 하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상(偶像)에 대해서다. 돌아보면 나는 두 번, 우상을 가졌었다. 처음은 어린 날의 우상으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어린 나에게 감당키 어려운 상처와 분노의 숙제를 안겨준 모순(矛盾)들에 대해 답을 줬다. 이론이 아니라 평등, 자유, 평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였다. 그중 여자에 대한 부분이 감동적이었다. 가장 비천한 여자에게도 존중과 사랑을 주었다. 위선과 탐욕과 허영과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야만적이며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당하며 죽어갔다. 이보다 더한 우상을 어디서 만날 수 있으랴! 그를 알고 믿는다는 사실로 그 시절의 불행감과 서러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이며 마지막인 우상은 신(神)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보통사람이었지만 내가 부러워 죽을 것 같은 직업을 가졌으며 그가 펼친 직업의 결과물들에 무턱대고 사로잡혔었다. 사진으로 본 바에 의하면 영화배우 못지않은 외모를 가졌었다. 오죽하면 서울에 처음 왔을 때 하늘을 쳐다보며 ‘이 하늘 밑에 그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그를 만난다거나 찾아간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다. 우상은 낱말풀이처럼 나무 돌 쇠붙이 흙 따위로 만든 상(像)이거나 무턱대고 존경하고 따르는 대상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으니 만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우상이 미신(迷信)의 대상물이란 의미도 강하니까.
여기에 쓰려고 등장시킨 우상, 그를 만난 건 어렵사리 소설가가 된 뒤,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 같다. 아주 작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전화를 했다. 나를 확인하자 자기 이름을 댔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기겁하지 않은 건 지금도 자랑스럽다. 그는 내가 일하는 건물의 지하 다방이니 내려오라고 했다. 오후 서너 시나 됐을까? 여러 개의 탁자 한군데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의 근황에 대한 것은 신문에서 읽거나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 나는 그가 찾아왔다는 비현실감 때문에 정신 줄을 놓쳤을지 모른다. 그런 내게 그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격려 및 칭찬을 해줬다. 나의 찬란한 미래도 예측해줬지만 그런 것이 왜 기쁘지 않았을까.
그는 우상이었으므로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고 내게는 현존(現存)하지 말아야 했다.
이날이었던가? 아니면 며칠 후였던가? 그가 나를 또다시 불러냈다. 퇴근을 하자면 두세 시간이 더 지나야 했는데 그는 삼선교 네거리 지하 찻집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 순간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건 우상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우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할 수 없는 일을 하면 됐다. 그런데 그가 보잘것없는 나를 기다리겠다니!
그는 혼자 있는 시간에 그린 여러 장의 그림을 보여줬다.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두렵고 슬펐다. 우상의 우상답지 못한 욕망과 집착을 이해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이었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우상을 가지지 않게 됐다. 덕분에 내 다채로운 식민지 근성은 서서히 사라졌다. 나의 욕망과 허영과 열등감 따위를 우상의 도움 없이 스스로 극복해야 했으니까.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영호_서울문화재단 혁신감사실 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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