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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현대미술가·피규어 수집가 돈선필 피규어와 지나가버린 시간들
돈선필 작가는 현대미술가이자 피규어 수집가다. 1996년 겨울, 깜짝 선물로 받게 된 플레이스테이션 덕분에 콘솔 게이머로 청소년기를 보냈고,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될 때쯤 어쩌다 알게 된 피규어에 흥미를 느껴 소박한 수집가의 삶을 보냈다. 30대가 되고 나서야 변덕스러운 관심사 속에서 끝까지 생존해 있던 피규어란 대상에 의문을 품고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지난 시간과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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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규어를 활용한 돈선필 작가의 전시 <끽태점 喫態店> 전경, 아라리오 뮤지엄 언더그라운드, 서울, 2019.

내 피규어 수집의 역사

종종 피규어 수집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는 ‘피규어와 수집이란 무엇일까?’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특히 무언가를 모은다는 행위, ‘수집’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신경 쓰인다. 소유한 컬렉션의 양이 보통 사람에 비해서는 많지만, 수집가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실하다. 그 때문에 수집한다는 행위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수집가와 일반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하다. 나는 아마 그 적당한 경계선에서 피규어를 모으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과연 피규어라는 사물을 구매하는 행위가 피규어를 수집하는 것일까?
잠시 2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외환위기 때문인지 세기말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사회다. 경제적 위기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청소년이지만 부모님의 대화와 간간이 접하는 뉴스를 통해 뭔가 좋지 않은 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다. 국가 부도 사태 이후 우연적 필연처럼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일반 가정에서 웹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고교 시절을 보낸다.
이때쯤 피규어란 사물을 알게 된다. 어린이를 위한 완구와는 달리 세밀한 완성도와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대에 멋진 조형물을 소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아이피규어’란 커뮤니티가 생겨나고 수집가들이 하나둘 모여 피규어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월드토이스’의 온라인 게시판은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중고 피규어 거래가 이뤄지기에 수시로 확인한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 상가에 자리한 ‘그로티’란 이름의 작은 피규어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첫 번째 피규어를 구매한다. 수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스폰 시리즈 피규어 중 하나다. 사람들이 서성이며 피규어를 고르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피규어를 구매하기 위해선 직접 몸을 움직여야 했다. 초고속 네트워크가 상용화되었지만 허술한 웹환경 탓에 네트워크에서 얻은 정보는 다시 아날로그로 번안된다. 홈페이지를 통해 알게 된 피규어숍의 주소를 찾아 교통편과 약도를 메모한 후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온라인을 통한 구매도 가능했지만 정보가 현저히 부족했다. 상세 제품 이미지를 섬세하게 촬영해서 올리는 사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니터를 통해 본 피규어는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치로 크기를 표시하더라도 사람이 느끼는 부피감은 실제와 항상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원하는 피규어를 웹사이트에서 발견했다면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이동시켰다. 근과거의 수집 활동은 신체가 함께하는 노동에 가깝다.

시대에 따라 수집 과정도 변한다

2019년인 현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예약 구매한 피규어를 수령하기 위해 수집가들이 피규어숍에 왁자지껄하게 모이는 일은 없다.
빛나는 모니터 화면과 스크롤, 클릭에 클릭을 더하면 구매가 끝난다. 스마트폰을 몇 번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면 더 간단히 마무리 된다. 부피가 있는 사물을 소유하는 과정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피규어를 선주문을 통해 소유한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면 현관 앞에 소환된다. 피규어 제작사는 자사의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각도로 촬영된 선명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수많은 리뷰어가 신제품 피규어에 대한 믿음을 더해준다. 인터넷에 부유하는 고화질 이미지와 유튜브의 4K 리뷰 영상은 소유할 물건의 신뢰 있는 가이드가 되어준다. 오늘날 피규어 이미지와 수집의 행위는 체계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피규어 수집가의 뿌듯한 마음과는 상반되게 생활 거주 면적을 조금씩 갉아먹는 피규어는 증식하면 할수록 삶의 짐이 되게 마련이다.
피규어 수집이란 이 사물이 가져올 경제적, 물리적인 부담을 담대히 이겨낼 용기 있는 이들의 전유물인 셈이다. 이 고난의 여정에서 수집가에게 잠깐의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 앞서 말한 인터넷 쇼핑이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이고 신속하게 수집을 돕는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수집의 과정도 변한 셈이다. 해마다 발전하는 피규어 제작 기술 덕분에 샘플 이미지와 별반 차이 없는 훌륭한 품질의 피규어가 양산된다. 마치 모니터 속 이미지가 현실에 구현된 것 마냥, 현실감은 없지만 현존하는 훌륭한 플라스틱 조각품이 바로 피규어다. 이처럼 피규어 수집가의 최근 행보는 손에 잡히는 사물이 아니라 ‘구체화된 이미지’를 구매하는 것에 가까워져 있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여전히 물질로서의 피규어가 매력 있다고 믿지만 시간이 흐르는 만큼, 피규어가 변화하는 만큼 자신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사람은 좀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기에 작업이나 전시를 통해 지나버린 시간을 정리하는 것 아닐까. 피규어 수집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피규어는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스러진 채 서랍 속에 잠들어 있다.

글·사진 제공 돈선필_현대미술가, 피규어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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