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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과 밴 클라이번 콩쿠르 록 스타의 인기를 얻은 클래식 스타
지난 6월 10일(미국 시간) 또 한 번의 낭보가 전해졌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미국 최고 권위의 피아노 콩쿠르인 제15회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 금메달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콩쿠르,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콩쿠르라면,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미국을 대표하는 콩쿠르라고 할 수 있다.

신지수의 음악 정원으로 관련 이미지

냉전 시대, 러시아에서 우승한 미국인

1958년, 밴 클라이번이라는 23살의 미국 청년 피아니스트가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예상을 뒤엎고 우승을 차지했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는 냉전 시대 소비에트 러시아 예술의 위대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니키타 흐루시초프(러시아어 발음은 흐루쇼프다.) 서기장 시절에 창설된 대회이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당 서기장이 된 후 동서 데탕트의 물결을 타고 미국 청년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에 결선 심사를 하던 심사위원들이 미국인 밴 클라이번이 1등을 차지하자 흐루시초프에게 전화를 해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심사 결과 미국 청년이 1위를 차지했는데 우승을 줘도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흐루시초프는 “그가 최고요?”라고 물었고, “그렇다면 그에게 주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흐루시초프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20세기 음악 역사는 크게 바뀔 뻔했다. 당시 2위는 레프 블라센코, 3위는 나움 슈타르크만(두 사람 모두 러시아인으로 후에 차이콥스키 음악원 교수가 된다.)이었으며 대망의 우승은 풍부하고 둥근 톤, 가창적인 프레이징이 훌륭한 밴 클라이번이 차지했다.
밴 클라이번은 스타성이 풍부한 아티스트였다. 키 크고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매너, 빼어난 피아노 터치는 러시아 청중들을 매료시켰고 특히 그가 러시아 국영방송 TV에 나와 피아노를 치면서 <모스크바의 밤>을 부른 사건은 많은 러시아인들을 열광케 했다. 밴 클라이번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 간의 갈등과 ‘아이언 커튼’이라고 불렸던 철의 장막이 금방 걷힐 것처럼 보였다. 당시 밴 클라이번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밴 클라이번의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이라는 업적을 기리기 위한 콩쿠르가 그로부터 4년 후 클라이번의 나이 27살 때인 1962년에 발 빠르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는 피아니스트, 게다가 청년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딴 국제 콩쿠르는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하다. 이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들은 라두 루푸(루마니아, 1966년), 크리스티안 자하리아스(독일, 1973년 준우승), 요절한 알렉세이 술타노프(러시아, 1989년), 올가 케른(러시아, 2001년) 등이다. 이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 5,600만 원을 상금으로 받는 동시에 3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100여 회에 이르는 콘서트를 열 수 있다. 그야말로 미국 전역에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를 얻게 되는, 신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콩쿠르다.

슈퍼스타이자 문화 영웅으로 불리다

밴 클라이번은 무대에서는 일찍 사라졌지만 2013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해리 트루먼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 앞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20살에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카네기홀에서 데뷔를 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다.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하며 미국과의 우주 개발에서 우위를 점했던 시기, 예술에 있어서도 러시아가 더 훌륭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던 소비에트 당국이었지만 결국 운명은 클라이번의 편이었다. 피날레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 클라이번은 무려 8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클라이번은 뉴욕에서 클래식 아티스트로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카퍼레이드를 했고 타임 지는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며 커버 스토리로 밴 클라이번을 다뤘다.
밴 클라이번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결과, 파이널 연주를 했던 키릴 콘드라신의 모스크바 필은 카네기홀에 초청받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우승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이 실황 음반으로 남아 있으니 밴 클라이번은 냉전 시대 미·소 교류의 역사적 아이콘이었던 셈이다. 당시 밴 클라이번이 동시에 녹음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앨범은 클래식 음반 역사상 최초로 플래티넘 앨범에 등극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958년 미국 피아노 교사 협회의 회장이자 창립자인 이를 앨리슨은 밴 클라이번의 이름을 딴 콩쿠르 개최를 발표했다. 상금은 1만 달러였다. 1962년, 음악교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제1회 밴 클라이번 콩쿠르가 포트워스의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에서 열렸다. 클라이번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밴 클라이번 재단의 계관 디렉터로 명예롭게 활동했다.
하지만 1978년, 클라이번은 아버지가 죽고 매니저 솔 후록도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고 대중의 시선을 피해 칩거했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백악관에서 만났을 때 연주를 하며 대중 앞에 나타난 그는 이날 밤 또다시 <모스크바의 밤>을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또 그해 카네기홀 100주년 기념 콘서트의 오프닝을 장식하기도 한 그는 1994년에는 전미 16개 도시 투어를 하기도 했다.
평소 새벽 5시경까지 연습하고 오후 1시 30분에 일어나는 올빼미 생활을 했던 밴 클라이번은 2013년 2월 뼈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클라이번을 ‘문화 영웅’(cultural hero)으로 칭하면서 “클래식 스타로서 드문 록 스타의 지위를 즐긴 아티스트”라고 평했다. 1958년 타임 지가 “호로비츠, 리베라치(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팝 피아니스트)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하나로 합쳐진 인물”이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15회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우예권이 부상으로 주어진 연주 기회를 통해 최고의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장일범_ 음악평론가,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학과 겸임교수. KBS 클래식 FM <장일범의 가정음악>과 MBC<TV예술무대>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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