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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7월호

공공성을 명목으로 한 선택, 배제, 검열검열의 일상성 또는 무감각에 대하여

최근 몇 년 사이 문화예술계 전 장르에서 검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돼왔다.
연극, 영화, 미술계에서 권력의 입김을 의심할 만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더 심각한 것은 권력이든 시장 메커니즘이든 자율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에 예술행정가와 예술가, 심지어 시민까지 점점 무감각해지는 상황이다.
공공성이라는 명목으로 공공성이 훼손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회 예술가 소위의 첫 번째 의제로 검열의 일상성을 다루었다.

진실 혹은 대담 관련 이미지

사회 |
곽효환시인, 대산문화재단 상무,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토론 |
고영직문학평론가, 전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문학수경향신문 편집국 부국장
박신의경희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이양구극단 해인 극작가 겸 연출가
이규석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본부장
임인자독립문화기획자,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최선설치미술가,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일시 |
2016. 6. 13(월) 15:00~17:30
장소 |
대학로연습실 다목적실
앵커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는 정치와는 많이 다릅니다. 문화는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문화란 본래, 가치가 뒤섞이는 지점을 말합니다. 문화는 49%와 51%를 또다시 뒤섞어놓습니다.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기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두 개의 국민 가운데 하나의 국민을 배제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두 개의 국민 가운데 하나의 국민을 탈락시킨다는 것은 ‘문화’적인 행위가 아니라, 바로 ‘정치’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검열 언어의 정치학: 두 개의 국민>(김재엽 작?연출) 중에서

어제 검열에 대한 연극(검열 언어의 정치학:두 개의 국민)을 보고나서 머리가 더 복잡해졌습니다. 지금 검열에 대한 위기감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먼저 정의해보면 좋겠습니다. 검열의 공공성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공성의 회복, 검열이 없는 예술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겠습니다.

이양구
작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창작산실지원사업에 선정된 박근형 연출가의 작품 선정을 취소하면서, 예술위의 직원 2명이 작가를 찾아가서 포기를 종용하고 예술위 직원들이 국가예술지원시스템(www.ncas.or.kr)에 접속해서 포기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 사안이 도종환 의원이 말했듯이 전자기록위작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감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팝업씨어터에서는 역시 예술위 직원들에 의해 공연 방해 행위가 있었습니다. 예술위 직원들은 자신들이 기획한 김정 연출가의 <이 아이>(프랑스 작가 조엘 폼프라 작품)가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담당 직원을 시켜 공연 취소를 종용하다가 여의치 않자 공연 당일 현장에서 공연팀이 의자를 못 옮기게 하거나, 공연 장소이던 씨어터 카페의 음악 소리를 크게 하기도 하고, 공연을 시작한 직후에는 관객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공연을 중단시키는 등 방해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정부는 물론 검찰도 조사하지 않았고 시민사회도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이 직원들은 그대로 일하고 있고요. 지금 이게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고영직
지금 검열의 양상은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고강도 탄압 방식, 이를테면 작가를 구속한다든가 하는 방식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다만 공공기관 지원금을 매개로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정부에서는 2008년 광우병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예술위가 <내일을 여는 작가>지 발행을 포함해서 3400만 원의 지원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어요. 작년부터는 ‘우수문예지지원’을 어떤 명목을 들어서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요. 저강도 탄압의 방식으로 바뀌고 있고, 몸의 모세혈관처럼 우리의 일상, 생각, 의식과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형태입니다. 이런 양상이 더 무서운 겁니다.
문학수
지금의 상황은 연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제 친구가 모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열흘 후에 담당자가 죄송하지만 강의가 취소되었다고 전화했어요. 말하자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산하단체에서 지원하는 강연이었는데요. 작년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운동에 이 친구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청와대가 임명하는 문화부 장관, 단체장을 장관이 임명하는 산하단체의 지원금으로 만들어지는 강연회가 실행될 때까지 일련의 사이클에 제동이 걸린 것이지요. 저도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연극계에서 지난해 일어난 상황에 대해 기사화했지만, 저 역시 검열을 받고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문인이나 예술가를 붙잡아 갈 때는 명목이 국가보안법 아니면 반공법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원금에서 배제한다거나 공연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입니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알아서 기는 양상이 벌어지는데,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검열에는 반드시 주체와 객체가 공모하는 지점이 있어요. 결코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양구 극단 해인 극작가 겸 연출가

사람의 정체성을 51%가 압도적으로 지배할 때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의 배합을 다양화하는 데 예술이 기여하는 것이고요.
고영직 문학평론가, 전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공공성이라는 잣대를 예술가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것이 예술 발전의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수 경향신문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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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의
저는 작년에 해외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는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일은 오래전부터 반복되던 일인데, 표현의 자유나 예술의 자율성 침해와 같은 본질적인 문제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원을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한 불만 정도로 축소해버리는 것이지요. 또는 당사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작품성에 따른 문제로 치부해버리면서 뭔가 예술인들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시니컬한 상황이 되는 겁니다.
이양구
저강도 탄압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사태를 바라보는 인식 차이라고 생각해요. 박근형 연출가는 작년에 자신에게 작품 포기를 종용하는 예술위 직원들을 ‘불쌍한 공무원들’이라고 했어요. 저는 직원들이 불쌍하다는 논리가 이해가 안 돼요.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불쌍하다’면서 포기 각서를 써줄 것이 아니라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도 성립이 안 돼요. 너무 명확하게 내 앞에 와서 불법을 저지르는 게 보이는 겁니다.
박신의
저는 요즘 ‘공무원과 준공무원의 DNA는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검열 사건에 연루된 예술위 직원들은 참여정부 때부터 잘 알던 사람들이고, 그들의 진정성도 전 여전히 믿고 있거든요. 그런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가 정말 의문입니다. 사실 문화부 공무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참여정부 때부터 계속 있어왔는데, 왜 태도가 저렇게 변하는지…. 정권의 성향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인지, 스스로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정권의 그늘 아래서 이들은 문화계 인사를 선별하고 배제하는 일을 자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탈하기만 합니다.
문학수
20세기 검열 하면 나치의 검열, 스탈린의 검열, 흔적으로 남아 있는 박정희 시대의 검열이 떠오르는데요.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검열’이라는 언어가 뚜렷하게 인식화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다르단 말이에요. 저는 검열이라는 기제가 분명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다른 언어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고영직
지금은 검열이라는 말로는 포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1961~)의 <관료제 유토피아>라는 책에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규칙과 절차의 얼굴을 하고 당연한 듯이 복종을 요구한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권력의 작동 방식이 과거처럼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독주하고 있어요. 예술가들은 시장화한 창작 환경 형태에서 자기 작업을 하기 위한 토대 자체가 약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저항 이상의 언어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양구
연극계에서 벌어진 사태는 규칙과 절차를 지키지 않은 문제입니다. 직권을 남용했고 문서를 위조했고 업무방해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계속 느낀 것은 선배 연출가 세대들은 이것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검열이라고 하지만 범죄행위와 범죄행위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서 얘기해야지 뭉뚱그려서 얘기하면 안 됩니다.
박신의
한국에서 문화 정책은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까지 그야말로 검열 그 자체였잖아요. 그땐 국가의 강력한 직접 통제와 기제 속에서 일어났다면, 이번 사건은 산하기관의 매개 인력들이 나선 것이어서 문제가 거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라 봅니다.
문학수
지금의 검열적 상황이 정권이 바뀌어도 내재화되고 영구화되는 것이 두려운 부분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건 소박한 것이고요. 저는 국가의 검열이라기보다는 권력자의 검열이라고 보거든요. 예전에는 권력자가 정보기관을 앞세워서 했는데, 지금은 산하기관장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검열하는 상황입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사권을 가진 사람들 눈치를 보지요. 저는 하부구조에 있는 직원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뿌리가 무엇인지, 구조가 무엇인지 더 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신의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예술위에 사무처장이 새로 왔을 때 예술위 직원들은 3일 동안 출근 저지 투쟁을 했지요. 예술위 직원들이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술위 직원들도 괴로운 상황이지 않을까 짐작합니다만…. 사실 이들이 괴롭다는 것은, 자신들의 예술에 대한 소신과 신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검열이 이뤄지면 얻는 쪽이 있고 잃는 쪽이 있을 텐데요. 누가 무엇을 얻고 누가 무엇을 잃었을까요.

문학수
가장 상처받는 사람들은 진정성을 가진 건강한 예술가들입니다. 시장 논리 속에서 싸워서 이겨낼 만한 상황도 아니라 지원이 필요한데요. 국가 하부기관들이 계속 장난을 치는 상황에서는 결국 건강한 예술가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통해 이익을 보는 예술가들도 분명 있습니다. 예술가뿐 아니라 그 주변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이 이익을 보고 있거든요. 정부기관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장 지배 구조에서는 살아남기 힘들고 지원을 많이 따내 권력을 가져야 하는, 조폭 구조 비슷하게 문화예술계가 굴러가는 이 상황에 어디선가 제동을 걸지 않으면 굉장히 심각해질 거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박신의
현재 예술행정 현장직은 결코 행복한 직업이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CEO나 직원들이 전문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면서 사업마다 성과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꽉 막힌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예술가와 예술 현장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요. 이런 식의 성과 중심 조직 문화가 이 정권에 들어와서 더 심해졌어요. 문화부조차 문화정책에 대한 기조와 신념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산하기관에 성과를 요구하는 격이다 보니, 갑으로서 지위에 대한 반성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검열이 진행된다는 것도 곧 예술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이 결여된 결과로도 볼 수 있겠고,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행정 위주의 관리체제화, 혹은 탈정치화, 중성화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공공성은 배려와 톨레랑스(관용), 타인에 대한 이해, 공정함과 정의로움입니다.
박신의 경희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예술은 사실 그 누구도 무엇도 의식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모두를 위하고 모두에게 공헌하는 것’입니다.
곽효환 시인, 대산문화재단 상무,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검열은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규석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본부장

문화부에서 개입하는 행위가 이 시대의 검열이라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만 그 행위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임인자 독립문화기획자,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또 다른 주체인 시민사회, 국민에게는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까요.

고영직
지금 문화부의 기본적인 정책 방향은 예술지원이 아니에요. 교육 지원에 있어요. 예술 지원은 계륵같이 여겨요. 집중 지원은 기금 고갈을 포장하는 방식이에요. 중요한 건 소신 있게 작업하는 작가들이 지원 과정에서 소외되고요. 저는 비유적으로 ‘평상을 하나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어요.1지금의 문화 정책은 추진은 잘하는데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없어요. 추진은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추구는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는 건데요. 우리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중간 체계, 평상이라는 협치가 깨져버리는 거잖아요.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어요.
이양구
검열에는 주체와 객체가 공모하는 지점이 있어요. 이 지점을 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박근형 연출 건에 주목하는 겁니다. 부당한 지시가 왔으면 직원들은 본인선에서 거부했어야 해요. 박근형 연출가도 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했나요? 다 도망갔잖아요. 국가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예술위 직원들과 연출가가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겁니다. 검열이란 게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 내에서 가장 문제가 되지 않을 방식으로 최선의 합의를 한 거라고 봐야죠. 사회가 자신들을 가장 비난하지 않을 방식,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지키는 방식으로 합의한 거라고 생각해요. 인간적으로 이해 못할 바는 아니겠지만요. 이때 훼손된 건 국가의 법질서고요. 피해는 다 같이 보는 거지요. 정말 난감한 것은 문제 제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서로 다른 공모에 같은 작품을 응모해서 선정됐다는 겁니다. 물론 법적인 권리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죠.

지금의 검열적 상황은 공공성을 명목으로 이뤄지고 있거든요. 예술문화 전반에서 이뤄져야 할 공공성이 무엇인지 정의해보면 좋겠어요.

진실 혹은 대담 관련 이미지

문학수
공공성이라는 말은 많이 쓰고 있지만 실체가 불명확하죠. 사전적 정의는 ‘모두에게 공통된 이익’인데 이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 현실이잖아요. 어차피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뺏길 수밖에 없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계속 해나가는 것보다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롭고 창의적이고,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의 개념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양구
공공성의 개념은 조한상 선생님이 알프레드 링켄(Alfred Rinken)을 인용해서 잘 정리해놓으셨는데요.2 어원은 라틴어 퍼블리쿠스(publicus, 인민의)이고 포풀러스(populus)의 형용사인데 피플(people)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첫 번째는 인민, 시민, 이들이 곧 공공성이다, 두 번째는 공통의 이해, 공공복리. 세 번째가 공개성, ‘모두에게 열려 있다’라고 합니다. 공공성은 의사소통의 과정, 토론을 통해 검증된다는 거죠. 공공성의 개념을 공적으로 논의해가는 과정 자체가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들어가면 공론장의 개념이지요. 물리적인 장소의 개념도 있지만, 포럼처럼 공적인 논의 공간이 다 공공성이에요. 일단 검열이 되면 아르코예술극장과 같은 물리적 공간을 빼앗기는 문제로 우선 다가오죠. 지원금, 지원 제도에 대한 모든 공적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고, 심사 결과에 대한 비판적 토론도 거부되고요.
박신의
일반적으로 공공성에 대해 거부감을 많이 갖고 있는데요. 공공성이 국가에 관계된 공적인 것,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공통적인 이익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현실에서는 계급 계층에 따라 선별과 배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문화 향유를 최대화한다고는 하지만, 이미 국가가 규정하는 문화가 교육받은 자에 한정할 경우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요. 그리고 공통의 이익에 대해서도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늘 있어왔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양구
작년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얘기가 정말 많이 나왔는데요. ‘모두에게 똑같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서는 공통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각자 모두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관점의 다양성이 공공성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검열에 들어가면 비판적인 논의, 관점의 다양성이 부정당합니다.
고영직
예술은 상상력의 빈곤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다양한 것이잖아요. 사람의 정체성을 51%가 압도적으로 지배할 때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의 배합을 어떻게 다양화할 것인지에 예술이 기여하는 것이고요.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지만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연애할 수 있는 것을 지향하는 의미의 공통성, 좋은 예술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신의
저는 예술경영을 ‘예술의 사회화’라고 정의해요. 예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일을 하는 것인데, 아직 우리나라 예술행정가들은 이러한 지점에서 전문성과 자신의 소신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물론 우리나라 예술경영의 역사가 짧은 탓에 그럴 수도 있지만, 이제는 서서히 그런 전문성을 본격적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이번 박근형 연출가의 경우도 전문가들에 의해 작품이 선정되었으면, 직원들은 집행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그들의 공공성이지요. 결국 예술행정가의 공공성이란 전문성이고, 그 전문성은 예술의 가치와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나 목표에 대해 신념을 갖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아직 우리에게 강력한 문화예술 리더가 없다는 것도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기도 해요. 만일 이번에도 강력한 리더가 방패가 되어주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규석
제가 공공성의 의미를 얘기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양한 사회적 가치나 관점이 갈등적 상황에서도 공존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문화예술 분야 지원기관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은 정치적 환경이 늘 변할 수밖에 없다는겁니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맞서서 갈등적 공존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의 문제거든요. 거기에는 소신의 문제가 작동할 수도 있고요. 때로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결단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는 거죠. 하지만 그 이유가 명확하다면 갈등적인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존시켜내려는 에너지가 문화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공공성의 미덕이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검열은 보수 정권의 절박한 정치적 욕망에 의해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사회적으로 거기에 맞설 수 있는 정치, 사회, 문화적 연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정 분야에만 국한되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를 우리 스스로가 내부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박신의
우리에게 강력한 리더가 없다 보니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초기에 서울대 출신 교수와 화가를 대상으로 초대한 것이나, 자신의 재임 기간에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겠다는 식의, 공정심을 잃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공공성은 배려와 톨레랑스(관용), 타인에 대한 이해, 공정함과 정의로움이거든요. 그런데 자기 취향을 드러내서 균형을 깨뜨리고, 직원들에게 그러한 업무를 하달하는 식이다 보니, 직원들이 전문성을 키워가면서 성장하게 하는 데 장애가 되는 리더의 모습이 여전하다고 봅니다.
최선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비정상의 정상화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비정상이 정상이라고 말했는데, 다른 관점에는 비정상이라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의하는 것은 그것을 범죄라고 얘기하지 못함으로써 그 룰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술계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다 룰이 무너진 것들이었고, 많은 예술가에게 큰 실망감을 넘어 절망감을 주었습니다.
임인자
저는 문화부에서 개입하는 행위가 이 시대의 검열이라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만 그 행위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상황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검열로 재정의하는 게 더 필요합니다. 예술위를 지키려고 했던 직원이 왜 검열의 당사자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문화부 산하기관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예술가들이 같이 들고일어났다면, 예술위를 우리가 지켰다면, 지금의 검열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었을 거예요. 그 담당자들은 이양구 연출님의 <필경사 바틀비>의 대사처럼 ‘프리퍼 낫 투(prefer not to)’,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을 거예요. 이 상황은 예술가와 행정가, 시민들이 공통으로 만들어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비정상의 정상화가 심각합니다. 누군가는 비정상이라고 말했는데, 다른 관점에서는 정상이라고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선 설치미술가, 서울문화재단 문화정책위원

우리가 말한 검열적 상황, 공공성의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요.

문학수
결국 민주적으로 성숙해질수록 공공성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더라도 예술가들에게는 어떤 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공공성이라는 잣대를 예술가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가야 하고 그것이 예술 발전의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기관들은 갈등과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초래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예술가들과 문화계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가 많아지면서 구조적인 시스템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이양구
팝업씨어터 검열 때 문제가 된 것은 세월호였거든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에서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가 세월호가 갖고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담당 직원 김진이 씨가 방송에 출연했을 때 ‘아티스트와 관객을 만나게 하는 게 내 역할이고 그렇게 4년간 일했는데 어느 날 내가 못 만나게 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와서 얘기하는 게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어요.3 예술이 공공성을 가진다고 할 때 예술은 국가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취급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형 연출가는 자신에게 작품 포기를 종용한 예술위 직원들을 jtbc 인터뷰에서 불쌍한 문화예술 공무원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두 직원도 여기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어떤 답변을 하지 않았고요. 제가 이 방송이 나간 뒤에 대학로 X포럼에 그들이 불쌍한 공무원이 아니라 공직자들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팝업씨어터에서 공연 방해를 지시받은 또 다른 예술위 직원 김진이 씨는 예술행정 공직자로서 자기 역할을 자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진이 씨를 통해서 팝업씨어터 공연 방해 사건이 <이 아이>의 공연팀(연출 김정)이 짓밟힌 사건이면서 동시에 예술행정 직원의 공적 업무가 짓밟힌 사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예술위 직원이라는 ‘인간’을 누구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고영직
공공의 더 큰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공유지가 사익화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예술가는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질 뿐만 아니라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저는 이 말이 검열 사태뿐만 아니라 예술하는 시민으로서 잡아야 할 공공성의 토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신의
공공성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 공공성의 이니셔티브가 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문을 닫으려는 지역 문예회관을 시민이 다시 살려서 시민 문화 공간으로 운영해서 성공한 사례가 있어요. 그분들의 주장은 공공성의 이니셔티브를 관으로부터 시민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공공성을 ‘공공권’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어요. 저희도 이니셔티브를 예술 현장으로 옮겨옴으로써 대안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4 에 나오는 ‘예술은 사실 그 누구도 무엇도 의식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모두를 위하고 모두에게 공헌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결국 차이를 존중하는 것, 다름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경영자와 예술행정가의 몫이라고 봅니다. 예술행정가들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제도적인 공공의 담론을 두텁게 형성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문화+서울

  • 1 고영직 ‘[크리틱] ‘평상’ 하나 놓읍시다’(한겨레, 2016. 6. 3)
  • 2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조한상 지음, 책세상)
  • 3 CBS라디오 <정관용의 시사자키> 2015년11월3일 방송 ‘연극계 검열과 탄압실태’(인터뷰 전문 www.nocutnews.co.kr/news/4498609).
  • 4 ‘시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세미나에서의 발표 원고)

* 토론 내용은 서울문화재단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니며 [문화+서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리 전민정
객원 편집위원
사진 최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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