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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복지국가와 예술 그러나, 우리

“이건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

이 속삭임은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낮춘 목소리다. 대개 가족은 혼인 신고와 주민 등록 같은 기록과 관혼상제 의례 속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받는다. 그렇다면 그 승인에서 벗어난 돌봄과 연대는 어떤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가. 도장도, 서명도 없이 서로의 끼니를 챙기고 상처를 감싸는 이들의 시간은 공문서 속에서 어떻게 위치하나. 공적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관계를 우리는 끝내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 전에 연출한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에서 이미 제기된다. 이 작품은 복지 행정과 맞물린 두 건의 자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 명은 미나마타병 피해자 보상과 관련해 사회보장 행정의 최전선에 서 있던 관료, 다른 한 명은 급여가 중단된 수급자다. 구조 개혁이 단행되던 일본 사회에서 고레에다는 국가의 정책적 판단이 가장 취약한 개인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추적한다. 행정은 개인을 수치와 요건으로 환원해 분류하고, 일정한 기준을 충족한 이들에게만 권리의 자격을 부여한다.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삶은 공적 언어 밖으로 밀려난다. 카메라는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춘다. 공적 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얼굴을 오래 붙들고 설명 대신 응시를, 규정 대신 머무름을 택한다. 보호와 배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를 전제한 채 말하기보다 머문다. 그 침묵 속에서 제도 바깥에 놓인 삶의 밀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태도는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 극적으로 구현된다. 엄마는 같지만 아빠는 모두 다른 네 아이가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은 아이가 있고,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도 있다.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주변의 시선은 위협이 된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초인종이 울리면 인기척을 지운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는 메모와 약간의 돈만 남긴 채 떠난다. 봄이 와도 소식은 없다. 생활비는 바닥나고, 가스와 전기·수도가 차례로 끊긴다. 아이들은 법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지만, 일상에서는 서로를 돌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문제는 이 아이들에게 사회안전망이 보호 장치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첫째의 말에 엄마는 “학교는 갈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 학교는 출석부와 보호자 서명이 필요한 제도의 공간이다. 보호자가 부재한 아이들은 그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는 법 역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과 충돌한다.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지만 16세 이하 청소년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없다. 보호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 이 금지는 생존의 가능성까지 차단하는 역설이 된다. 복지도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고, 그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도움을 청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이 된다. 동네 편의점 점원은 아이들에게 복지기관에 도움을 요청해보라고 얘기하지만, 이마저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다 뿔뿔이 흩어지잖아요. 전에도 그랬다가 난리가 났죠.” 보호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야 하지만, 드러나는 순간 함께 머물 수 없게 되는 모순. 통합을 목표로 설계된 장치가 오히려 고립을 심화하는 역설이 이들의 삶을 잠식한다.

<어느 가족>2018에서 공동체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한 공간에 모여 있으나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사람들. 이들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며 상처와 결핍을 공유한다. 할머니의 연금에 기대고, 훔친 물건으로 식탁을 채우며, 다닥다닥 붙어 잠든다. 방은 좁지만,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학대 위험에 놓인 소녀를 데려와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이 결속은 선택과 책임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들의 생존 방식은 법질서와 직접 충돌한다. 반복된 절도 행각과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연금을 계속 수령해온 사실, 게다가 학대받던 소녀를 데려왔다는 사정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삶은 수사 대상이 된다. 돌봄의 선택은 법의 언어 안에서 절도·사기·유괴의 혐의로 재명명된다. 그러나, 판결이 공동체를 해체할지라도 함께한 시간을 삭제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가족이 된 방식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를 책임지겠다는 결정과 곁에 남겠다는 선택에 있기 때문이다.

고레에다의 영화는 우리가 ‘정상正常’이라 불러온 질서의 균열을 조용히 드러낸다. 사회의 눈에는 비정상과 범죄로 읽히는 관계를 오래 응시하며 묻는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믿어온 가족의 형식은 자명한 실체인가, 아니면 반복된 상상과 합의가 빚어낸 구성물인가. 그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어디에서,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는가. 감독은 섣불리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쉽게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모른다’는 말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급한 판단을 잠시 멈추는 침묵이다. 그 머뭇거림 안에서 관객은 정상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사회의 구성원으로 서게 된다. 누가 가족이 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자리이자, 동시에 배제를 가능하게 한 관습이 작동하는 자리에서. 이제 “이건 비밀인데, 우린 가족이야”라는 낮은 속삭임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넘어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이 된다. 그 비밀을 숨길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아는 비밀로 만들 것인가.

최정상 보건복지부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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