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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맑음보다 갬
― 비거스렁이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추적추적’이라는 부사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추적追跡을 두 번 반복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빗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자연스레 누군가의 뒤를 쫓고 있는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숨죽인 채 살금살금 걷는 사람 뒤로 말없음표처럼 찍히는 발자국을 떠올리면 공연히 쓸쓸해졌다. 뒤돌아보지 않는 한, 저 사람은 자신의 발자취를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의 뒤를 쫓는 사람은 자신의 뒤를 살피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움푹 팬 발자국 안으로 비는 스며들고 그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비는 그치고 거리에는 한동안 축축한 기운이 돌 것이다.

“빗밑이 재네.” 외할머니로부터 저 말을 들었던 때는 비가 그친 오후였다. 몇 번이나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빛 밑이요? 아니면 빗의 밑이요?” 빛 아래 서 있는 나를 상상하다가 가지런히 머리털을 빗는 모습을 떠올렸다. 외할머니는 노트를 펼쳐 다섯 글자를 큼지막하게 써주셨다. 난생처음 접한 말 앞에서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빗밑이 뭐예요?” “비가 그친 다음, 날이 개는 속도를 뜻해. 그것이 재니까 가볍고 빠른 거지. 재빠르게 비가 마를 때 쓰는 표현이야.” 저 순간은 아직 유일하다. 성장하면서 ‘빗밑이 재다’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 말이다. 어떤 표현은 빗기운을 품고 있는 구름처럼 사전 안에만 있다.

단어를 새로 알게 된 날에는 집에 와서 자꾸만 적어보게 된다. 빗밑, 빗밑, 빗밑…… 비의 밑이 드러났으니 마르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빗밑은 잴 수도, 가볍거나 무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비 갠 날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갬’과 관련된 새로운 비밀을 하나 갖게 된 듯싶었다. 실생활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처음에 내가 그랬듯, ‘빗밑’을 ‘빛 밑’이나 ‘빈 밑’ 등으로 들을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빗밑의 뜻을 설명하고 속도나 무게를 표현하는 형용사와 함께 쓰인다고 부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나게 말하는 나와 달리,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낄지도 모른다. 이제 막 갰는데, 다시 비가 올지도 모른다니 안 될 일이다.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다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비와 관련한 단어들을 새로이 알게 될 때면, 내 머릿속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어느 때는 소낙비처럼, 또 어느 때는 가랑비처럼. 단어를 만났기 때문에 그것은 늘 단비였다. 마치 이때껏 그 단어를 찾아 헤맸던 것처럼, 나는 연신 발음하고 어떻게 하면 이 단어를 글이나 말로 풀어낼 수 있을지 고심했다. ‘비설거지’를 알게 된 날도 그랬다. 처음에는 ‘비 非설거지’라고 알아듣고 ‘설거지가 아니라는 건가?’라고 자문하며 잠시 갸웃하기도 했다. 비설거지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먹고 난 뒤의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을 뜻하는 ‘설거지’의 두 번째 뜻이기도 하다. 둘 다 ‘정리’라는 의미를 공유하는 셈이다.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할 때, 빗줄기가 갑자기 거세질 때 비설거지하는 일이 많아진다. 비설거지는 ‘황급히’라는 부사와 가까울 수밖에 없다. 비설거지하는 사람들의 안색은 밝지 않을 것이다. 비 내리는 하늘의 먹구름처럼 급격히 어두워지기 십상이다. 아끼는 물건들, 어렵게 재배한 농작물들, 볕을 쐬어줄 요량으로 밖에 꺼내어둔 화분들을 재바르게 안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처마 밑이 있어서, 실내가 있어서, 방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하며 도리질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그제야 나직이 한숨을 내쉴 것이다. 때마침 싱크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짓감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수도 있다.

비와 관련된 단어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비거스렁이’다. 비거스렁이는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비가 개면 쌀쌀해진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거스렁이는 아마 ‘비를 거스르다’라는 뜻을 담고 있지 않을까. 비를 거슬렀기에(일이 돌아가는 상황이나 흐름과 반대되거나 어긋나는 태도를 취했기에─거스르다 1) 갠 날씨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비를 거슬렀기에(셈할 돈을 빼고 나머지 돈을 도로 주거나 받았기에─거스르다 2) 홀가분하게 비 온 후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비를 거슬렀기에(풀 따위를 벴기에─거스르다 3) 하늘은 예의 말끔한 표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빗줄기와 풀의 모양이 묘하게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을 수도 있다.

작년 가을, 엄마에게 이 단어를 알려드린 적이 있다. 엄마는 잊을 만하면 “아까 뭐라고 했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단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날은 비거스렁이 효과를 몸소 느낄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서늘함이 싸늘함이 되었기 때문이다. 밤 산책을 하다 부지런히 가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기도 했다. 나는 비가 오면 지렁이가 나오는 것까지 이야기하며 연상을 통해 단어를 기억하게 하려고 애썼다. ‘거스르다’보다는 ‘지렁이’가 더 가까운 단어니까 말이다. 그 후로 비가 개면 엄마의 입에서는 저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비거스렁이하니까 겉옷을 입고 외출해야겠어.” 그렇다. 눈치챘겠지만 ‘비거스렁이’는 명사고 ‘비거스렁이하다’는 동사다.

틈만 나면(비가 그치고 나면) 주변에 ‘비거스렁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맑은 날씨보다 갠 날씨를 개인적으로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생활이 늘 맑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뜻하지 않게 비도 내리고 눈도 퍼붓고 천둥과 번개가 동반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흔히 맑음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갬은 ‘이전’을 반추하게 만든다. 날씨든 기분이든, 개기 전에는 궂은 상태였을 것이다. 언짢고 우울한 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갬은 찾아온다. 비로소 다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아무래도 나는 맑음보다 갬이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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