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 주인공이 되어
바쁜 프리랜서라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한 밤이었다. 태어난 지 이제 17개월이 된 작은 아이를 재우고 쌓인 설거지거리와 어지러운 거실을 내려다보며,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바쁜 직장인, 안 바쁜 직장인, 안 바쁜 프리랜서까지 모두 경험해본 바 바쁜 프리랜서가 제일 낫다. 바쁜 직장인이었을 땐 정답이 없는 자기 질문에 늘 갇혀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쟤는 노는데 왜 나만 일하나,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이 맞나, 나는 누구인가 같은. 안 바쁜 직장인 시절도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화장실을 오가고 커피 한잔 마시는 일까지 눈치가 보여 종일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곤 했으니까. 가장 고단한 걸로 치면 안 바쁜 프리랜서일 때다. 태만한 백수와는 다르다는 걸 세상을 향해 설명하느라 고달팠다. 그러니 바쁜 프리랜서란 얼마나 행복한가, 하며 입꼬리 근육을 힘차게 끌어올릴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회의 일정을 미루자는 연락을 받고 반가움을 느끼며 빠르게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쫓기듯 일하고 육아하던 매일매일에서 잠시 빠져나와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기회다. 무엇보다 봄 아닌가! 몸이 마음을 따르기까지 수십 분쯤 걸리긴 했지만, 얇은 티셔츠에 경량 패딩을 걸쳐 입고, 깨끗한 흰 운동화를 꺼내 신으니 그 자체로 뭔가 좀 가뿐해진 기분이 들었다.
남산공원을 걷기 시작하며 Shakira의 ‘Try Everything’을 들었다. 평소 자동차 안에서 운전하며 듣던 음울한 분위기의 연주곡들이란 어쩐지 겨우내 묵은 먼지처럼 느껴져 훌훌 넘겨 버렸다. 스포티파이가 만들어놓은 ‘봄 플레이리스트’로 활기를
좀 찾아볼까 하다 Counting Crows의 ‘Accidentally In Love’를 만났고, 이 곡이 나의 추억을 헤집어 좋아했던 기억을 찾아냈다. Shakira가 한참 인기를 끌던 시기에는 ‘캔디’ 같은 한국의 유행가를 따라 부르던 초등학생이었던 탓에 보컬에 대한 친밀도는 높지 않지만, 작곡가인 SIa에게는 커다란 애정이 있다. 이 곡이 삽입된 디즈니 영화 <주토피아>에도.
그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쨍한 날씨처럼 희망적인 애니메이션 OST를 들으며 오르니 발걸음도 점점 음악과 닮아졌다. 한 발 한 발 탁탁 돌계단과 부딪히는 발소리, 금세 가빠지는 호흡. 잡념을 위해 쓰던 에너지가 하나둘 몸으로 집중되고, 머릿속에 꼭 붙들고 있던 것들, 사소하고 사사로운 기억도 조금씩 지워졌다. 어떠한 연유로 집요하게 붙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게 될 만큼 숨이 찼을 땐 남산타워가 눈앞에 있었다. 35분쯤 쉬지 않고 빠르게 걸어 오른 나는 팔각정에 다다르자마자 뒤로 누워 버렸다.
SIa의 멜로디는 듣는 이의 마음을 고양하는 힘이 있다. 작곡가 스스로 어둡고 불행한 과거를 밝힌 바 있고, 삶의 불안이나 우울감, 두려움의 감정을 음악이나 음악 외 활동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멜로디로 내질러지는 그 마지막 표현에는 시원스러운 홀가분함이 묻어난다. 특히 이 곡은 SIa의 여러 명곡 중 가장 밝고 예쁜 응원이다.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뭐든 잘될 거라고 말하는 듯한 격려. 무려 제목도 ‘Try Everything’이다. 불어오는 봄을 온몸으로 마중하며 이 계절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천천히
돌아내려가며
“인생은 뮤지컬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니야. 노래만 부른다고 뭐든 다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영화 <주토피아>에 나오는 몇몇 좋아하는 대사 중 이 말이 문득 떠올라 웃음이 났다. 주인공 토끼 순경 주디를 향해 물소 경찰서장 보고가 하는 말이다. 보고는 차갑고 엄격한 성격의 인물 아니, 동물이지만 꽤 좋은 선배이기도 하다. 주디가 기대에 들떠 실수하지 않도록 질서와 규칙을 알려주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도움도 준다. 나에게도 보고 같은 선배가 있었다면 직장생활을 잘 해냈으려나.
보고의 말처럼 활기찬 노래를 듣고 부른다고 세상의 주인공이 될 리도, 삶이 마냥 행복하기만 할 리도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음악은 이렇게 즐거운 ‘잠깐’을 만들고, 그 순간의 힘으로 일상을 또 잘 영위하게 되는 것 아닐까. 서울을 한눈에 담고 다시 에너지를 채운 후 아이에게 돌아가는 이 순간처럼.
내리막길에는 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의 돌리 모음곡Dolly Suite 첫 번째 곡을 들었다. 봄기운을 마치 피아노로 그린 듯한 사랑스럽고 애틋한 곡이다. 제목은 ‘자장가’. 한 대의 피아노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연탄곡으로, 한 사람이 비슷한 리듬 패턴의 아르페지오를 반복하면 다른 한 사람이 옥타브로 이루어진 단순한, 그러면서도 맑고 예쁜 멜로디를 들려준다. 아기를 가만히 흔들며 새근새근 재우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고, 그저 따뜻하고 다정한 기운을 채우기에도 좋은 선곡이다.
여러 작곡가가 자신의 아이 혹은 주변의 아이를 위한 곡을 남겨두었는데, 이를테면 슈만의 어린이 정경이나 드뷔시의 어린이 세계,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애틋한 마음을 전한다면 드뷔시는 또렷한 생동감을 들려준다. 그에 반해 포레는
작은 아이를 품에 꼭 안을 때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을 그려두었다. 숨을 후 내쉬며 따뜻한 봄 햇살 아래 느리게 걷기에 좋은 짧고 다정한 이야기가 된다.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재생한 선우정아의 ‘우리네 봄’은 꽤 멋진 엔딩과 같은 곡이었다. 따뜻한 차를 컵에 또르르 따르는 소리로 시작해 마치 동요 같은 왈츠 리듬에 맞추어 현실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봄바람 살며시 불어오네/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있을까/하루에도 몇 번씩/먼 산만 바라보네/거기 우리가 꾸던 꿈 걸려있네.”
먼 산만 바라보듯 바보같이 사는 나, 그리고 나와 상관없이 부는 봄바람. ‘Try Everything’보다는 이쪽이 현실과 가깝긴 하다. 이 곡은 한숨이 푹 쉬어지는 마음을 콧노래 같은 흥얼거림으로 부르며 그 무게를 덜어낸다. 한탄도 하고 춤도 추고, 멀리 걸린 꿈도 좇아보자는 조심스러운 다독임이다.
몸을 깨우고 음악에 힘을 빌리니 다시 찾아온 멋진 계절이 조금은 내 것 같다.
글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저자 김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