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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거대한 노이즈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사람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새해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들은 음악이 그해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야기. 물론 낭설이지만, 왜 이런 말은 그토록 오래 기억되는 걸까? 이 말을 신경 쓰면서 새해를 맞이한 지 어느덧 7년 차다. 처음 몇 년은 새해의 첫 곡을 대단히 공들여 선곡했지만, 최근 몇 년은 단 하나의 음악을 고르기보다는 올해의 음악적 운명을 어느 쪽으로 몰고 갈지를 좀 더 생각해보고 있다. 아무렴 일 년의 운명을 첫 곡 단 하나에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년의 산뜻한 기운은 어느새 일상에 스며들어 흐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애를 써서 올해는 어느 쪽으로 갈지 부단히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음악을 들을까. 어떤 현장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볼까. 그간 현대음악의 고전을 파고든 해도, 즉흥음악가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닌 해도 있었고, 다시 한번 서양 전통의 고전을 사랑하려 애쓴 때도, 여러 협업 무대를 찾아다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날들을 지나, 올해 내가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을 써보고 싶은 것은 특별히 음악이라고 부를 필요 없지만 몹시 멋진 소리들이다. 그 소리에 제목이나 이름이 없다면 더욱더 좋겠다. 음악 아닌 소리, 이름 없는 소리… 이렇게 모호하게 부를 수밖에 없는 소리들에 관심이 생긴 건 최근 가까이에서 경험한 공연 두 편 때문이다.

먼저 11월 1일 밤, 강원도 평창에서는 <N4-i>라는 공연이 열렸다. 한국천문연구원 KVN서울대평창전파천문대 앞을 무대로 삼은 이 공연은 ‘미래음악: 클래식랩 융합 레지던시’의 두 번째 시즌 쇼케이스로, 전자음악가 노디, 디자이너 오혜진, 작곡가 이중현, 생황 연주자 한지수가 함께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여러 맥락이 있지만 내가 이해하기에 이 공연은 무엇보다도 미지를 관측하는 일에 대한 헌사였다. 전파망원경은 거대한 안테나를 하늘로 향한 채 온갖 주파수 대역을 관측하며 전파를 수신한다. 까마득한 높이와 크기, 그 지름이 어느 정도인지마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눈과 귀인 어떤 것. 거기에서는 당장 ‘정보’라 부르기 어려운, 노이즈에 가까운 데이터가 천문학적인 양으로 수집된다.

아티스트들이 공연의 구조로 삼은 것은 바로 그 전파망원경의 관측 시퀀스였다. 그들은 정돈된 음악 대신 분석되지 않은 데이터와 같은 노이즈를 발견하고, 수집하고, 그 안에서 어떤 미약한 신호를 찾아 끄집어내곤 했다. 때론 보편의 음악이 들려왔지만, 이 공연의 상당 시간을 차지한 것이자 내게 대단히 아름답게 다가온 것은 음악이 아닌 작은 신호음 같은 소리,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며 무언가를 찾는 소리, 요소를 하나하나 변별할 수 없는 덩어리와 같은 소리들이었다. 작고도 거대한 노이즈. 여기서 노이즈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 대상이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발견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불분명한 음향 덩어리를 하나의 가능 세계로 받아들이며 귀를 활짝 열어두는 시간은 더없이 충만했다.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의 풍경

다음으로 12월 27일 늦은 오후,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에서는 ‘트랜지언츠’로 활동하는 조예본·윤지영의 공연이 있었다. 음악가, 그중에서도 전자음악가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이들은 최근 필드레코딩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내게는 전자음악가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자재로 소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환상이 있다. 소리에 관해서라면 때로 전능해 보이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들기의 영역으로 구현할 수 없는 세상 속 소리가 지닌 복합성을 섬세히 ‘듣고’ 그곳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들의 작업은 특정 시공간에서 들려온 소리를 고스란히 녹음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고, 여러 장소에서 채집해온 그 녹음본을 공연 현장에서 새롭게 구성하며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트랜지언츠는 지난 공연에서 그 소리의 원래 맥락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듯 “모월 모일, 어디에서 녹음”이라는 말을 포함한 필드레코딩을 들려줬다. 그러나 공연에서 그것들은 여러 번 중첩되고, 광주의 소리를 듣다가 어느새 몽골 토그체치의 소리를 듣는 식으로 소리를 통해 여러 도시를 오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공연이 형성해내는 상상의 시공간은, 실제의 여러 풍경이 뒤섞인 묘한 시공간이 됐다. 현실과 음악이 형성하는 시공간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그 소리는 풍성하고도 정교한 노이즈에 가까워졌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듯한 그 멋진 소리들은 보편의 필드레코딩이나 음악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한층 증강된 어떤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어디의 어떤 소리인지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저 들려오는 것들을 공들여 들었다. 명확하던 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데려다 놓는 그 과정은 나를 오히려 순수한 듣기의 상태에 진입하게 하는, 묘한 시간이었다. 잘 알려진, 이름 붙여진, 잘 설명되곤 하는 보편의 음악에서는 결코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검증된 고전부터 마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악, 믿고 들을 수 있는 곡까지, 세상에는 정말로 또렷하고 멋진 음악이 많지만, 내가 올해의 운명을 걸어보고 싶은 쪽은 그 바깥으로 나아가보려 하는 미지의 소리들이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소리. 하나하나 변별하기 어려운 음향 덩어리. 음악이라 부르기엔 좀 아쉬운, 그보다 크게 느껴지는 어떤 것. 이 소리들에 대해 당장 덧붙일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지만, 여기서 지금 내가 순수한 듣기의 기쁨을 누리고 발견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불분명한 소리 덩어리들이 올해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지 내심 기대해보게 된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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