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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끝에서 마침내 시작되는 것
—끄트머리에서 맏물 상상하기

2025년의 끄트머리에서 이 글을 쓴다. 끄트머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끝의 머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끝에도 머리가 있다니,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만난 최종 보스가 연상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머리를 보기 위해 그간 오랜 여정을 이어온 기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가차 없이 저 머리를 쳐야 할까, 다정함을 그득 담아 쓰다듬어주어야 할까. 기사는 지금 당황하고 있다. 그는 끝에 왜 다다라야 했는지 이제야 질문한다. 어물쩍대며 끝에서 고작 시작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끝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시작을, 끝 다음에 다시 펼쳐질지도 모를 시작을. 그는 대체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돌아본다. ‘끝장’을 보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실패고 패망이고 파탄이기 때문이다. 기사는 정처 없이 헤매다 마주한 길의 끝들을 떠올린다. 끝장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르는’ 것이었다. 일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끝이 그러했다.

끝에 와서야 여정이 분명해진다. 어떤 길을 택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갈림길에서 망설인 끝에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는지, 도중에 지쳐서 쉬고 싶었으나 다시 걸음을 내딛게 한 힘은 무엇이었는지. 끝이 있어서 다행이다. 돌아볼 수 있으니까. 어떤 발자국이 찍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가로질러 올 수 있던 곳을 에둘러 온 까닭을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으니까. 여기에 이른 것만이, 이 앞에 다다른 것만이 중요하다. 도중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끝에 와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끝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시원섭섭하다’라는 형용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다음 문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끝은 ‘끝’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와 함께 종종 한 몸을 이룬다. 먼저 끝맺음. ‘끝맺음’은 “어떤 일이나 글의 끝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끝맺음 인사를 하지 않고 보낸 편지에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이 있다면,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만두었던 사람이 있다면 맺는 일이야말로 끝이 갖는 아름다움임을 알 것이다. 맺음은 매듭으로 거듭나니까, 그 매듭으로 인해 삶의 한 단락이 마무리되니까. 끝맺음은 ‘끝맺이’로 표현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끝막음. ‘끝막음’은 “일을 끝내어 완전히 맺음. 또는 그 일”을 가리키는 단어다. 끝맺음과는 달리 완결의 느낌이 더욱 강하다. 이야기와 논쟁, 삶 등은 펼쳐지는 순간, 끝막음을 향할 수밖에 없다. 끝막음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셰에라자드가 매일 밤 천일야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삶과 이야기는 또 이렇게 끝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바둑에서는 “끝마감으로 바둑돌을 놓는 것”을 가리켜 ‘끝내기’라고 한다. 끝낸다는 말은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일을 다 마무리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때는 홀가분하다가도, 그것의 두 번째 뜻인 “시간이나 공간에서 이어져 있던 것이 다 되어 없어지게 하다”를 마주하면 자못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 이어져 있던 것을 없어지게 하는 것. 이는 소비, 소모, 소진 등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면서도, 그것이 소멸을 전제로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에 아찔해지는 것이다. ‘끝내다’가 ‘끝나다’의 사동사이므로 ‘끝나다’도 살펴보아야 한다. ‘끝나다’ 또한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시험이 끝나거나 일이 끝났을 때와 방학이 끝나거나 점심시간이 끝났을 때 우리가 품는 감정은 전혀 다르다. “본래의 상태가 결딴이 나서 무너지거나 없어지다”라는 ‘끝나다’의 세 번째 뜻은 심지어 무시무시하기까지 하다. 관계의 종결과 회복 불가능성을 다 담고 있는 단어기 때문이다. 한편, “일의 끝을 다잡음”이라는 뜻의 ‘끝단속’이라는 단어는 끝에도 끝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끝빨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도저히 뜻을 짐작할 수 없었다. 꽃의 끝부분을 핥는 벌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꿀 빨다’라는 은어 때문에 자동 연상되었을 것이다. ‘끝빨다’의 첫 번째 뜻은 “끝이 차차 가늘어져 뾰족하다”이다. ‘빨다’의 세 번째 뜻 또한 이와 같다. 문제는 ‘끝빨다’의 두 번째 뜻이다. “어떤 일시적인 좋은 상태가 그 뒤로 내려오면서 쇠퇴하여 보잘것없다”가 바로 그것이다. 뾰족해지는 게 날카로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제 몸뚱이를 잃는 일이기도 하다. 부피를 잃어가는 일은 몸집이 줄어드는 일이고, 이는 ‘끗발’이 사라지는 일과도 비슷하다.

‘끝없다’라는 단어는 “끝나는 데가 없거나 제한이 없다”라는 뜻이다. 끝이 없다니 근사하면서도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유한하기에 시간을 비롯한 자원은 소중하고 언젠가 헤어질 수밖에 없기에 오랜만에 갖는 만남은 더욱 애틋할 수 있다. 끝없는 충성을 맹세하는 이를 의심하는 것도, 끝없는 바다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끝없음은 또한 호기심이나 재능처럼 무궁무진함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지만, 갈등이나 전쟁처럼 막막함을 강조할 때도 사용된다. 끝없음은 그지없음으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이때의 ‘그지’는 한도를 뜻하는 옛말이다. “한정된 정도나 일정한 정도”를 가리키는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해 볼게”라고 다짐하거나 “참는 데도 한도가 있어”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 쓰인다. 끝없음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단어여서일지도 모른다.

끝에 다다라서야 끝눈을 볼 수 있다. ‘끝눈’은 “식물의 줄기나 가지 끝에 생기는 눈”을 가리킨다. 끝에 눈이 있으므로 더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단어로 ‘끝코’가 있다. “뜨개질에서, 끝에 낸 코”를 일컫는 단어다. “일의 뒤끝을 수습하는 일”을 뜻하는 ‘끝갈망’이라는 단어도 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다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물’은 “곡식, 과실, 해산물 따위에서, 그해의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과 “시절의 마지막 때”를 뜻하는 단어다. 끝물은 생기 없고 애처롭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끝물의 반대말인 ‘맏물’을 갈망하게 만든다. 끝갈망 끝에서 마침내 첫 갈망을 할 수 있게 된다.

처음과 끝의 인사가 둘 다 ‘안녕’인 이유는 이 둘이 애초에 하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의 끝이 저기의 시작이니까, 겨울의 끝이 봄의 시작이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경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절을 따지면서도, 마음 한쪽은 늘 환절기를 허우적대는지도 모른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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